“덕분에 나는 새삼 깨우친다. 인생은 혼자라는 것과 자유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헤라니메일 30회기념 자축과 자책

“언니는 글쓰는 것 하나도 힘 안 들지? 머릿속에서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손끝에서 술술 나오니까.”

칭찬인지 흉인지, 아주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대뜸 던지는 말이다. 인터넷이 좋긴 좋다. 미국에서도 여성신문을 읽을 수 있으니.

“그럼, 얼마나 쉽다고. 노상 하나마나한 이야기나 늘어놓는데 무슨 힘이 들겠냐?”라고 너그러운 척 받아넘기긴 했지만 은근히 심사가 뒤틀린다. 내 딴에는 매주 꼭지를 채우느라고 용을 쓰는데 모두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서다.

누군가와의 인터뷰에서 내 나이가 되면 콘텐츠가 넘쳐 흐르게 마련이라고 큰소리를 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글쓸 때마다 글감을 캐느라 하루 종일 끙끙댄다. 재고가 완전 바닥이다. 아니 바닥을 쳤다면 치고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으련만 그것도 아니다. 갈수록 수렁이다. 그저 칠렐레 팔렐레 살다 보니 상상력이 말라버린 데다 생활이 점점 단순해져서 그런 모양이다.

처음 '헤라니메일'이란 제목을 골랐을 때는 친구들에게 메일을 보내듯이 아주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쓰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었었다. 정말 순진했지! 아무리 영양가 없는 글이라도 일단 글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그 놈(그 년? 아니면 그 분?)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가.

시간이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가는 내 나이대에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시간의 압박도 크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자유주제라는 데 있다. 아무도 나에게 어떤 것에 대해서 써달라고 명령도 요청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쓸지 순전히 내 맘대로다. 그런데 내 맘이라는 게 영 내 맘 같지 않은 걸.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자유주제를 과제로 내주면 어김없이 '주제 정해 주세요!'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주입식 교육의 생생한 사례가 바로 여기 있노라며 혼자 비분강개하곤 했는데 요즘은 내가 그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가끔 여러 매체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때도 주제가 정해져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부담감이 천양지차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주제를 청탁받을 때도 있지만 그거야 안(못) 쓰겠다고 사양하면 그뿐이다. 일단 주제가 마음에 들면 글쓰기는 그야말로 가볍고 즐거운 작업이다.

반면 자유주제는 처음엔 가볍지만 서서히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청탁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후회하기 시작해서 결국 마감날까지 진탕 괴로워해야 풀려난다.

거창한 주제는 아예 생각만 해도 소화불량이고, 남이 한 이야기는 쓰기 전부터 싫증이 나고, 멋진 주장 따위는 내 주제에 어울리지 않고, 어려운 말은 쓰고 싶어도 몰라서 못 쓴다. 그저 내 주변에서 본 것, 느낀 것을 약간의 양념을 뿌려 써내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눈도 흐려지고 느낌도 둔해지니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고 머리를 짜내도 도대체 쓸만한 게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괴롭힌다. 글감 하나만 줘봐. 요즘 무슨 생각 하면서 살아? 뭐가 알고 싶어? 친구들끼리 모이면 무슨 이야기하지? 남편이고 친구고 아들이고 걸렸다 하면 다그친다. 물론 소득은 없다. 아무 얘기나 시답잖은 거 갖고도 잘도 쓰더구먼, 새삼스레 뭘 그래? 그냥 쓰고 싶은 거 아무 거나 써, 아무 거나. 아니, 그 잘난 글감 하나만 주면 어디가 덧나나? 도대체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니까.

덕분에 나는 새삼 깨우친다. 인생은 혼자라는 것과 자유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그래, 태어날 때부터 너는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길을 정해 주었다면 훨씬 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아니 아니, 사실은 정해져 있었지. 여자의 길은 어때야 한다고 모두 합창했잖아. 정해진 길이 싫다며, 자유롭고 싶다며 왕왕대더니, 이제 와서 뭐 주제를 정해 달라고? 너무 욕하지 마시우. 그게 인생 아니겠수?(주: 헤라니메일 30회를 맞아 자축과 자책을 겸한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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