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cafe.daum.net/gerontology

결혼기념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선물을 주고받은 기억은 없고, 아이들 어렸을 때는 그날 전후로 해서 몇 번 여행을 다녀왔다. 두 아이가 자라면서 머리를 맞대고 카드도 만들어주고 작은 꽃다발도 사오곤 해서, 케이크에 초 꽂아놓고 아이들의 축하 노래를 듣는 것이 결혼기념일 저녁 우리 집 풍경이다. 그런데 올해는 남편이 부산에서 근무중인 바람에 따로 떨어져 결혼기념일을 보내야 했다. 전날 밤의 통화에서 남편이 다음 날 아침에 집에 있을 것인지를 묻는다. 강의가 있어 아홉 시쯤 나간다는 대답에 혼잣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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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회사에서 꽃바구니 보낸다고 해서….”

대뜸 내가 하는 말.

“그래? 경비실에 맡겨놓고 가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아이들한테 꽃은 사지 말라고 해도 되겠네.”

◀결혼기념일 때 아이들이 만들어 준 카드.

아줌마만이 할 수 있는 이 실용적인 대사라니….

결혼기념일 아침. 식탁에는 아이들이 전날 사온 엄마용 조각 케이크 하나와 둘이 예쁘게 만든 신랑신부 그림 카드가 놓여 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뽀뽀로 답례를 하고, 남편에게는 매일 아침 보내는 이메일 안부 인사에 내 마음을 슬쩍 실어 보냈다. 외출준비를 끝내고 막 출발하려는데 벨이 울리더니 택배회사에서 왔다는 소리가 들린다. 장미가 한 가득 꽂힌 바구니 앞에서 '카드회사에서 보냈는데 생각보다 크구나' 하며 사인을 하려는데, 아뿔싸, 보내는 사람 칸에 남편의 이름이 써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이런, 꽃바구니 보낸다고 하면 뭐 하러 그러냐, 너무 비싼 것 보내지 마라, 할까 봐 슬쩍 카드회사 핑계를 댔구나 싶으면서 기가 막히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 무슨 정신으로 꽃바구니를 받아 집안에 들여놓았는지 모르겠다.

서둘러 나가려는데 꽃 사이에 끼여 있는 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카드까지, 하며 열어보니 컴퓨터 글씨로 써 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과의 소중한 결혼기념일을 자축하며 늘 내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당신! 말은 안 했지만 고맙게 생각하고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어주길 바래. - 당신을 늘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어느 누가 혼자 맞는 결혼기념일 아침에 멋진 장미꽃 바구니와 이런 카드를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까. 차마 전화로는 인사를 못 할 것 같아, 강의하러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남편에게 문자를 날린다. 정말 카드회사에서 보내는 줄 알았다고, 예쁜 꽃과 마음이 담긴 카드 고맙다고.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결혼기념일이 지나간 며칠 후 주말에 일어났다. 조금 시들긴 했지만 그런 대로 예쁜 모습이 남아 있는 꽃바구니를 집에 도착한 남편에게 소개하고(남편은 전화로 배달 신청만 했기에 꽃바구니는 구경도 못 했으므로), 슬쩍 카드 문구는 직접 썼느냐고 묻는다. 눈이 둥그래진 남편, '무슨 카드?' 하며 되묻는다. 혹시 컴퓨터에 견본 문구가 있어서 그 중에서 하나 고른 것 아니냐고까지 물러섰으나, 무심한 남편은 한마디로 깨끗하게 고백한다. 카드를 보내는 줄도 몰랐다고. 헉! 그런 줄도 모르고 역시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이렇게 마음을 표현하는구나,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동 또 감동했던 나. 억울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했다. 솔직히 김이 새면서 기분이 좀 나빠졌다.

'책상에 고이 모셔놨던 카드 당장 치워야지.'

그러나 남편에게 등을 돌리고 설거지를 하며 곰곰 생각한 끝에 마음을 고쳐먹는다.

'꽃바구니만 받았어도 참으로 행복했을 그날, 카드까지 있어 더 좋았으면 됐지 뭐. 그 순간 남편의 마음이라고 믿은 그대로 이 카드는 이제 영원히 내 것이다. 꽃바구니의 꽃은 시들어 없어지겠지만 이 카드는 두고두고 보면서 올해 결혼기념일을 기억하리라.'

이 다음에 늙어서도 결혼기념일에 이 이야기하며 쿡쿡 웃을 수 있기를. 그러려면 아무래도 사이좋게 같이 늙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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