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3년 허송세월
헌재 판결 이후 임신중지 '비범죄화' 됐으나
"법 없다" 핑계 대며 환자 부담 가중 시켜
유산유도제 승인, 의료비 지원 등 보장부터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화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낙태죄' 완전 폐지하라'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2020년 10월 8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에서 모두를위한낙태폐지공동행동은 '처벌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낙태죄' 완전 폐지하라' 기자회견을 열고 항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홍수형 기자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며 임신중단권리를 폐기하자 국내 상황에도 관심이 주목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상황이 국내에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분석하며 국민건강보험을 통해 임신중지에 대한 의료비 지원을 보장하고 유산유도제를 국내로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 6월 24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은 여성의 임신중지를 헌법상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례를 찬성 5명 대 반대 4명으로 50년 만에 번복했다. 한국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에도 인용됐던 미국의 ‘6개월 이내 임신중단 권리 보장’ 판결이 뒤집히자 국내에서도 앞으로의 법·제도 향방이 주목되고 있다.

“저처럼 13만원도 없어서 약 구매를 망설이는 분들이 경제적인 지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틀이 필요해요. 임신중지를 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국민건강보험 적용이예요.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도 임신중지를 할 수 있게끔, 본인의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게끔 제도가 마련돼야 해요. 또 건강보험이라는 것은 ‘국가에서 임신중지를 보장한다’는 선언적인 측면에서도 너무나 필요해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 행동 ‘2021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 인터뷰’ 중 발췌)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신체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형법의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21년 1월 1일부로 임신중지를 죄로 다스리는 법적 실효가 없어진 것. 그러나 이미 임신 중지 수술이 비범죄화 됐음에도 관련 정책이나 의료체계가 정착되지 않아 고통 받는 것은 결국 여성이었다. 특히 임신 중지 수술에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비용적인 부담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3월 만 19~44세 여성 중 최근 5년 내 임신중단을 경험한 사람 6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헌재 결정 이후인 2020~2021년 임신중단 경험자 중 ‘의료비용(수술·약물 모두 포함)이 매우 부담됐다’는 응답은 41.4%였다.

현재는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돌봄이 제공돼야 한다”고 권고했던 헌재의 결정문과 반대로 국가 차원의 임신중지와 관련된 상담·정보가 요원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달 30일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보면 여성들이 인공임신중절 관련 정보를 습득한 경로는 ‘인터넷 게시물 또는 온라인을 통한 불특정 대상’이 46.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의료인(의사, 간호사 등) 40.3%, △친구 및 지인(선후배, 직장동료 등) 34.0% 순으로 집계됐다.

“(약물을 구하는 방법을)알아봤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한 친구는 외국에 나갔다오면 약물을 많이 사와서 급한 사람들 나눠주곤 했는데 저도 혹시나해서 물어봤지만 받지 못했어요. 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어떤 절차를 밟으면 받을 수 있대서 알아봤는데 몇 주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 행동 ‘2021 임신중지 경험 설문·실태조사 및 심층 인터뷰’ 중 발췌)

온라인으로 알음알음 관련 약물과 정보를 얻을 창구마저도 닫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해 말 임신중단 관련 정보와 약물을 구할 수 있는 국제 비영리단체 ‘위민온웹’(women on web) 홈페이지의 국내 접속을 차단했다. 국내에서는 전문 의약품을 처방 없이 일반인이 구입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 이유다. 올해 3월 오픈네트워크·진보네트워크 등 시민단체들이 이를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지난해 3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신중지의 건강보험 적용과 유산유도제 도입을 요구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지난해 3월 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임신중지의 건강보험 적용과 유산유도제 도입을 요구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국내 낙태죄 폐지 운동을 이끌어온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의 나영 대표는 ‘입법공백’이라는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말했다. 그는 “입법공백은 여성 결정권을 임신 주수 등 어떠한 기준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라며 “입법공백이라고 해서 새로운 기준을 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비범죄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와 사회·경제적 지원 체계를 마련하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영 대표는 “정부가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일은 공적 의료체계 영역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임신중지도 다른 의료 행위와 마찬가지로 보건소부터 3차 의료기관까지 필요한 의료 지원이 연계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임신시기에 따른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가이드와 공급 체계가 마련되면 건강보험이나 유산유도제를 통해서 경제적인 이유 등 때문에 부득이하게 임신중지 시기가 늦춰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며 “특히 미프진을 통한 약물적 임신중지는 유럽 주요국가에서 70% 이상이 선택하는 주된 임신중지 방법”이라고 얘기했다.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는 의료 현장에선 기존에 법이 막아도 수술을 해왔기 때문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고 밝혔다. 최 전문의는 “의사의 관행대로 임신중지 의료 행위가 진행되고 있어 별다른 건 없다. 그러나 의사들이 임신중지 수술을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로 인식하기 위해선 건강보험이 도입돼야 한다”며 “환자들이 임신중지도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관련 국가통계도 나와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임신중지에 쓰이는 약물인 미소프로스톨을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최 전문의는 “미소프로스톨도 임신중지에 쓰이도록 검증이 된 약은 아니지만 실제로 쓰고 있어 이를 유산유도제로 포함시키거나 도입해야 한다”며 “임신중지 의약품을 산부인과 처방에만 한정할 경우 지역에 사는 여성들의 접근성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일반 의료기관까지 처방을 확대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캐나다는 유산유도제의 의료서비스 확립을 시키기까지 오래 걸렸다”며 “그러나 우리가 실패 사례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덧붙였다. 국내에선 학계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 미소프로스톨 도입 허가가 미뤄지고 있다.

최 전문의는 미국의 상황이 한국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 전문의는 “거꾸로 간 미국처럼 우리가 현 상태에서 나빠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의료 지원 체계를 만들면 된다. 이를 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책임 공백”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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