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전석 매진작 배우·제작진 귀환
전무송·박정자·손숙 등 대배우들 조연
3040 젊은 배우들이 주연 맡아
현대적 외피 두른 정통극...배우들 열연 빛나
‘여성혐오’ 지적 받는 원작 속 가부장 사회
수동적인 여성 인물 그대로 재현해 아쉬워
8월 1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연극 ‘햄릿’ 중 주인공 ‘햄릿’(강필석 분)과 ‘레어티즈’(박건형 분)의 결투 장면.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중 주인공 ‘햄릿’(강필석 분)과 ‘레어티즈’(박건형 분)의 결투 장면.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1막 오프닝.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1막 오프닝. ⓒ신시컴퍼니 제공

신시컴퍼니의 ‘햄릿’은 지금 연극 팬들이 가장 주목하는 작품이다. 대형 제작사, 초호화 캐스팅, 셰익스피어 고전의 만남으로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이달 초부터 온라인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 연극 예매율 1위를 지키고 있다. 휘황찬란한 무대 세트나 효과보다 원작과 배우들의 힘에 승부를 걸었고, 통했다는 평가다.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젊은 배우들이 눈에 띈다. 주인공 ‘햄릿’은 뮤지컬 ‘썸씽로튼’으로 제5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강필석(44)이 맡았다. 아버지를 죽인 숙부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도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는 햄릿을 섬세한 연기로 표현했다. 길해연(58·루시아누스), 박건형(45·레어티즈), 김수현(52·호레이쇼), 김명기(42·로젠크란츠), 이호철(35·길덴스턴) 박지연(34·오필리어)도 열연했다.

대배우들이 조연과 단역을 맡았다. 줄곧 ‘햄릿’ 역을 맡았던 유인촌(71)은 비정한 숙부 ‘클로디어스’, 김성녀(72)는 ‘거트루드’, 박정자(80), 손숙(78), 윤석화(66), 손봉숙(66)은 유랑극단 배우 1, 2, 3, 4가 됐다. 모사꾼 ‘폴로니우스’와 ‘무덤파기1’은 정동환(73)이, ‘무덤파기2’와 ‘사제’는 권성덕(82)이, ‘유령’은 전무송(81)이 맡았다. 대사도 분량도 적다. 그래도 일단 무대에 등장하면 유머러스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연기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무늬는 현대극이지만 정통극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희미하게 표현한 처음과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손진책 연출가는 “현대인의 심리로 햄릿을 보려 한다”며 “보다 정통적이고 예리하게 작품 내면을 들여다볼 것”이라고 밝혔다. 배삼식 작가는 “‘햄릿’은 인간 안에 깃든 어둠과 심연을 탐사하는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인간의 정신이 지닌 탄력성과 마음의 힘, 그 면역력을 관객들에게 일깨우는 것이 ‘햄릿’에 극작가로 참여하는 사명”이라고 했다.

연극 ‘햄릿’ 중 유랑극단 배우 1, 2, 3, 4로 분한 박정자, 손숙, 윤석화, 손봉숙 배우.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중 유랑극단 배우 1, 2, 3, 4로 분한 박정자, 손숙, 윤석화, 손봉숙 배우.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중 ‘오필리어’(박지연 분).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중 ‘오필리어’(박지연 분).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중 주인공 ‘햄릿’(강필석 분)과 어머니 ‘거트루드’(김성녀 분).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햄릿’ 중 주인공 ‘햄릿’(강필석 분)과 어머니 ‘거트루드’(김성녀 분). ⓒ신시컴퍼니 제공

다만 ‘햄릿’이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은 아쉽다. 여성주의 관점으로 고전을 변주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시대가 아닌가. 최근 3년간만 해도 비극적 희생양으로 그려진 오필리아를 주체적 인물로 되살리거나(영화 ‘오필리아’, 2021), ‘여성 햄릿’이 이끌어가는(연극 ‘함익’, 2019) 작품이 나왔다. 2022년 연극 ‘햄릿’의 선택은 그래서 더 아쉽다. 400여 년 전 고전을 무대에 올리면서 구시대적 사회상까지도 별 고민 없이 재현했기 때문이다.

극은 햄릿과 클로디어스 등 남성들의 복잡한 속내를 독백이나 대화로써 보여주는 데 큰 비중을 할애한다. 반면 오필리어와 거트루드의 이야기는 빈칸으로 남겨둔다. 이들이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햄릿에 대한 사랑과 가부장제 하 ‘여성의 의무’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할 때 정도다.

‘여성혐오’라는 지적을 받아온 원작 속 장면들도 고스란히 재현됐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혼란과 분노에 빠진 햄릿이 애꿎은 화살을 거트루드와 오필리어에게 돌리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선왕이 죽은 지 얼마 안 돼 시동생과 재혼했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부도덕한 여성으로 낙인찍힌다. 갑작스러운 왕의 서거로 인한 국정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정략결혼은 아니었을까? 거트루드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긴 했을까? ‘햄릿’은 묻지 않는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고 탄식할 뿐이다.

오필리어는 어떤가. 처음부터 아빠 폴로니어스와 오빠 레어티즈로부터 ‘남자를 믿지 마라, 여자는 정조를 지켜라’ 훈계를 듣는다. 아버지가 연인 햄릿을 빠뜨릴 함정을 판 것도 모르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한다. 햄릿은 오필리어를 거칠게 대하면서 “그대는 순결한 여자인가” 운운하더니, “수녀원으로 가시오. 왜 죄 많은 인간을 낳고 싶어 하오”라고 몰아붙인다.

가엾은 오필리어는 햄릿이 아버지를 왕으로 오인해 죽이자 슬픔을 못 이기고 미쳐 버린다. 거트루드는 아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비난하는데도 진심으로 걱정하다가 독배를 대신 마시고 죽는다. 남성들이 고뇌하고 분노하고 행동하는 동안,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순응하며 침묵하다가 남성들이 일으킨 갈등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비극적 최후를 맞고 만다. 2022년에 이런 방식의 재현이 최선이었을까. 코로나19 위기를 딛고 큰 무대로 돌아온 ‘햄릿’이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유연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더라면 더 반가웠을 것이다. 러닝타임 175분(인터미션 20분 포함). 8월 13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