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당사자 가족이 본 ‘우영우’]
많은 고민과 노력 엿보이지만
공존 어려운 장애 특징 섞어 만든
비현실적 캐릭터 우영우
자폐스펙트럼 장애 인식 왜곡 우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열풍이 뜨겁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여성 변호사 주인공을 앞세워 사회적 편견을 깬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자폐당사자와 보호자들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치료 중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보낸 글을 싣습니다. 관련 의견이나 문의는 saltnpepa@womennews.co.kr 로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평소, 이른바 ‘불편러’들을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나를 억지로 잡아채 반성 의자에 앉히려는 듯한 그 불편의 말들이 불편했다. 거듭 글을 고치는 지금도, 여전히 나의 불편이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음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하지만 나의 이 불편한 한 마디가, 나처럼 이 따스한 이야기에 온전히 함께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영우가 불편하다.

미디어 속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우영우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진태(박정민 분)가 있었고, 드라마 ‘굿닥터’의 박시온(주원 분)이 있었다. 기억 저편에서 ‘말아톤’의 윤초원(조승우 분)을 꺼내어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언급한 캐릭터와 그들의 이야기는 당시 내게 어떤 불편함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우영우는 불편하다. 우영우가 유달리 장애인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방영 중인 현재, 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의심으로 치료 중인 41개월 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가 스크린 속 동화를 현실로 바꿔놓은 것이다.

처음 소견을 받을 무렵.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지금보다도 더 생소한 단어였다. 스스로 아스퍼거 증후군임을 밝힌 일론 머스크와 혼자 대소변조차 가릴 수 없는 발달장애 환자가 모두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범주에 포함된다. 보호자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증상은 있지만 너무 어려서 아직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체, 우리 아이는 어찌 되는 건가요, 늘 현재 진행형으로 혼란스럽고 초조하고 불안했다.

많은 시간을 거쳐 가까스로 알아보기보다 기다리기를 선택했을 무렵, 신드롬에 가까운 우영우 열기에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드라마를 통해 생각이 바뀌었다는 평가도 있었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과 그 가족의 반응도 화제가 됐다. 우영우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우영우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에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많은 고민과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전보다 성숙하게, 그리고 조심스레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다룬다. 우영우와 그의 이야기는 사랑스럽다. 언뜻 보기에 불편이 끼어들 여지는 없고, 단지 생트집에 불과한 것만 같다.

문자 그대로 광활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원, 시온, 진태, 그리고 우영우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대중에게 사랑받고 미디어가 다루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큰 틀에서 정형화됐다. 부족한 사회성과 독특한 행동으로 대인 관계와 의사소통,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특정 분야에서는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그들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드러내는 극적 장치는 평범하지 않은 눈짓, 표정, 말투, 사고방식, 그리고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다. 캐릭터는 위태로우면서도 엉뚱하고 사랑스럽게 잘 만들어져있다. 연출자는 이야기로, 연기자는 열연으로 호평받는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증상으로 인해 겪는 어려움은 불편인가, 삶을 흔드는 치명적인 장애인가? 피아니스트, 의사, 변호사라는 직업은 그들이 가진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편견을 딛고 노력한 결과인가, 타고난 재능의 결과인가?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ENA 수목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한 장면. ⓒENA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과 그 가족이 경제활동은 고사하고 씻기고, 먹이고, 입히는 일상을 보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나의 보살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드라마 속 고난과 갈등은 차라리 해프닝에 가깝다. 우영우는 이미 경제활동이 가능한 전문직 사회구성원으로서, 대다수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을 극복한 상태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시사 프로그램도 아니다. 가상의 캐릭터 우영우가 모든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대변할 수 없음도, 그러한 기대가 부당함도 자명하다. 그러나 미디어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박시온, 진태를 거치며 미디어가 쌓아 올린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왜곡된 인상은 어느새 공고해졌고 사랑스러운 우영우를 통해 방점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우영우를 연결 지어 생각할 것이다.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이 모두 불행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 살아가며 접하는 수많은 타인에게,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는 있어야 한다. 극적 장치를 위해 서로 공존하기 어려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특징을 편의대로 섞은 비현실적인 캐릭터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한 인식을 다소 왜곡할 우려가 있다.

작년 이맘때 지인에게 아이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자 ‘그럼 서번트 같은 거 아니야? 막 다 외우고 그럴 수 있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지인이 나에게 악의를 가져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 무심함을 몇 번이고 곱씹게 되는 내가 미워 한동안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우영우가 불편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지나친다. 이제는 ‘우영우처럼’이라며 한 마디를 쉽게 툭 던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우영우라는 캐릭터의 행동을 웃음으로 승화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단지 우영우 때문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는 사람 때문임을 알면서도 우영우를 편히 볼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숨을 고르고 한 걸음 떨어져 생각해보면, 이제야 비로소 내 차례가 된 것이다. 

외모의 매력이 부족한 사람, 지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 결핍과 불편을 가진 사람은 늘 대중의 이야깃거리였다. ‘맨발의 기봉이’, ‘7번 방의 선물’이 인기를 끌 때 함께 웃지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러했듯 불편함이 과민하다고 느낀 사람들 역시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매 순간 타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온전히 느끼며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늘 불편한 사람 내지 불편을 고까워하는 사람이 된다.

다시 한 걸음 더 떨어져 생각해보면, 어느새 지적 장애를 흉내 내며 희화화하는 모습이 미디어에서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관심과 불편을 거름 삼아 사회는 배려심을 가지고 성숙해졌다. 우영우로 인해 사람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많은 수고와 노력을 덜 수 있을 것이다. 우영우가 펼치는 이야기와, 우영우를 통해 이야기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희망을 느끼게 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불편의 목소리와 따스한 관심이 섞여 다음에는 더 나은 시선과 시도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못내 우영우가 불편한 사람에게, 그리고 이 글이 여전히 불편한 사람에게 당부하고 싶다. 세상에 우영우가 불편한 사람이 나와 당신 단둘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우영우가 불편하지 않다고 해서 당신이 몰지각한 사람도 아닐 것이다. 단지 세상에는 우영우의 이야기가 즐겁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특별히 모나거나 삐딱한 게 아니라, 그저 함께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와 다른 시선을 인정하는 것이 타인, 나아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