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그리다』 박상천 지음, 나무발전소 펴냄

시인 박상천이 친구이자 인생의 동지였던 아내를 떠나 보내고 쓴 도망시(悼亡詩)를 모아 『그녀를 그리다』를 펴냈다. ⓒ나무발전소
시인 박상천이 친구이자 인생의 동지였던 아내를 떠나 보내고 쓴 도망시(悼亡詩)를 모아 『그녀를 그리다』를 펴냈다. ⓒ나무발전소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아침 먹은 미음 그릇을 치우지도 못하고 병원에 갔던 동생이 돌아오지 못했을 때,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느닷없는 이별 뒤 떠난 이가 남긴 흔적은 하나하나 칼이 되고 채찍이 된다. 하물며 그가 몇 십 년을 사랑하고 미워하기를, 싸우고 화해하기를 거듭해오다 마침내 가장 마음 맞는 친구가 된 배우자임에랴.

시인 박상천은 동갑내기 아내를 홀연히 떠나보냈다. 이른 아침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는 그의 삶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바꿔버렸다.

당신, 최근 제게 전화 걸어 본 적 있나요?
당신이 혹시 제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착신음 서비스에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을 올려놓았어요.
가사처럼, 그렇게 살고 있어요.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은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음 거짓말“
당신의 거짓말이 아니라
당신의 진심을 알기에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당신은 내게 ‘다시 오겠다’고
‘잠깐이면 될 거라고’ 말한 적은 없었지요.
그래서 당신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제 생활이 어느 날 문득
모두 거짓말이 되어버렸지요.

늦은 밤 내가 깊이 잠들어 전화를 받지 못하더라도
제가 어떻게 사는지
전화 착신음을 한번 들어보세요.
“우 우 우 우 우
찬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우 우 우 우 우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가사가 슬프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까지 슬퍼하진 마세요.
모두 거짓말일 거예요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전문)

그렇게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떠나버린 아내는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따뜻한 사람이었고 남다른 사람이었다. 30년 가까이 신문기자로 일했던 아내 박인숙은 유별난 축구광이었다. 유럽 프로축구를 보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

프리미어 리그 시즌이면
식구들 모두 잠든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거실에 혼자 앉아
텔레비전 중계를 보며 즐거워하던 당신
(중략)
오늘 새벽엔,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프리미어리그를 보았다.
중계를 보며
열심히 코치를 하거나
유럽 축구를 설명해주던
당신 목소리는 무음 (프리미어 리그 중에서)

『그녀를 그리다』 박상천 지음, 나무발전소 펴냄
『그녀를 그리다』 박상천 지음, 나무발전소 펴냄

무음이 된 아내의 말을 남편은 듣는다. “뭘 우리가 그렇게 뜨거웠다고 시까지 써?”(그녀를 그리다, 마지막 중에서) 웃음 섞인 아내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그는 ‘관대한 친구’였던 아내를 그린다.

아내를 잃고 쓴 시를 도망시(悼亡詩)라 한다. 서진 시대(299년)의 문장가 반악이 아내를 잃고 쓴 도망시가 절창이다. 조선 시대에는 아내가 쓰던 농과 함을 보며 “함과 농 그대로이나 주인 없으니/볼 때마다 큰 슬픔 참지 못하겠네”라고 썼던 조선 선비 임재당(任再堂·1678∼1726)이 있고,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도 귀양살이 중 아내를 잃고 “월하노인에게 빌어서/다음 세상에는 서로가 바꿔 태어나/천리 밖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슬픔을 (그대가) 알게 하리오“라고 쓴 도망시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도 있다.

다시 박상천 시인의 시로 간다. 아내와 함께 텃밭에서 가꾼 무와 배추로 담은 김치를 냉장고 맨 아래 칸에 넣어두었던 그는 “늘 거기 있음에 안심이 되었기에 그냥 거기 두고 싶었습니다. 그냥 거기 두고 싶었습니다.”라고 쓴다. 마지막 남은 김치로 찌개를 끓이고 딸과 마주앉아 “그냥 거기 둘 걸/ 정리하지 말 걸,/ 꾸역꾸역이라는 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아파한다. 친구이자 인생의 동지였던 아내에게 보내는 21세기의 도망시에 담긴 것은 서로 존중하며 지지하는 성평등 부부의 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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