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공동체, 공동육아 가족, 한부모 가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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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현재 다양한 가족을 실험중이다. 혈연가족 안에서도 갈등은 존재하며, 비혈연 가족 안에서도 친밀감의 교류가 가능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중심이 된 소위 정상가족이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으나 아직까지 이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는 곳곳에서 유효하다. 특히 공사분리에 익숙한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사적인 것으로 치부돼 그 부조리나 병리현상 자체도 드러내기를 부담스러워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존 가족 이데올로기를 해체해 새로운 가족으로 확장시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열린' 가족을 지향하는 몇몇 시도들을 소개한다.

◀한국사회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붕괴되고 있는가. 다양한 가족을 실험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진·민원기 기자>

◆ 비혼여성 공동체 김종순씨 가족

프로그래머인 김종순씨(31)는 천리안 여성학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 세 명과 96년부터 동거를 시작했다. 처음엔 지방에 사는 이들끼리 경제적인 부담을 줄이기 위해 시작했지만 여성 공동체를 실험해 보자는 생각에 1주일에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하는 등 의사결정과정에서 평등한 방식을 택한다. 안건은 취사, 청소, 경제적인 쓰임새 문제 등이다. 현재는 어느 정도 생활 방식이 맞추어져 함께 할 취미나 즐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기에는 매일 저녁 대안가족, 사는 이야기를 천리안에 게재하기도 했다. 김씨는 “우리나라는 결혼으로 맺어지는 관계만 가족으로 인정하는데, 혈연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분명 가족이다”고 강조한다. 30대 초반의 이들은 적극적으로 비혼을 지향하며 여성주의 공동체를 꿈꾼다.

◆ 언니네 가족과 공동육아 임영순씨 가족

7년째 언니네 가족과 한 집에서 사는 임영순씨(39, 서울시 성북구) 가족은 경제적인 문제로 한 집 살이를 하는 경우다. 중학생, 초등학생인 언니네 아이들과 여섯 살짜리 아들을 함께 양육하는 임씨 가족은 네 명의 어른들이 번갈아 가며 일찍 귀가, 아이들을 돌본다. 단체활동가인 임씨는 “남편에게 얘기해서 공간적으로 불편하더라도 같이 살자고 양해를 구했다. 혈연은 아니지만 육아문제는 사회적으로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다”고 말한다. 생활비는 반씩 부담, 가사분담은 그와 언니가 주로 맡고 남편이 보조하는 정도다. 임씨는 “아이의 사회성, 정서적인 부분에서 사촌들과 지내는 것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며 “핵가족이 사가족화되어 이기적인 생활양태를 보여주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물론 힘든 점이 없지 않다. 가사노동을 언니와 임씨가 주로 해야 하고 아이들이 커갈수록 양육비를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다.

◆ 심리적 안정감 추구하는 모녀 삼대 석윤수경씨 가족

석윤수경씨(37, 울산)가족은 3년째 모녀 삼대가 모여 산다.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피해 석윤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남편과는 5년째 별거중. 10살 된 딸은 이혼가정이 몇 되는 주변의 친구들 탓에 '아빠 엄마가 사이가 안 좋으면 떨어져 살 수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한다. 석윤씨는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힘든 반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느낄 때도 많다. 그는 “한국 사회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아주 심하다”며 “학교에 가면 '행복한 우리 가정 조사해 오기' '아빠, 엄마 계보 적어 오기'등 모든 교과과정이 가족 이데올로기를 세뇌시키는 과목으로 되어 있다”고 흥분한다. 석윤씨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랑 살아 좋은 점은 서로 '모셔야' 될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한번 싸우면 감정이 누적되는 남녀 사이와 달리 싸우다가도 부둥켜안고 울기도 한다.

◆ '결손'가정에 반기 든 한부모 가족 박모씨 가족

한부모가족인 박모씨(43, 서울시 중구)는 92년 이혼한 뒤 12년 동안 딸과 살고 있다. 이혼 당시 네 살이던 아이가 한부모가족들과 자조모임을 하는 사이 훌쩍 자라 중학생이 됐다. 박씨는 자조모임을 만들고 나서 다들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인지 심리적인 도움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아이들도 또래가 비슷해 친구를 만들어준 계기도 됐다. 박씨는 “연말 연시 등 가족이 강조되는 달이 되면 엄마들보다 아이들이 상실감을 더 느낀다. 일상에선 전혀 느끼지않는 '결손'도 가족이데올로기만 나오면 느낀다”고 말한다. 또한 “가족 형태가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1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며 “물어보면 얘기는 하지만 아이들도 공표하길 꺼리고 이웃에게도 자랑스럽게 공개하지는 않는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최근 거론되는 '건강가족기본법'의 '건강가족' 담론이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오히려 상대적인 위축감을 느끼게 한다”면서 “학교의 과제물 수행 하나도 엄마, 아빠랑 하는 게 많아 아이들이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토로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21세기 신가족 코드

21세기 신가족 코드가 다양성, 포용성, 보살핌과 배려, 평등관계 맺기, 그리고 '여성'의 재발견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가족사회학자, 여성학자 등 전문가 그룹을 통해 가족 비전을 들어본다.

◆ 측은지심의 모성사회로 세상을 회복시키는 작업부터

'가족은 무엇인가?'보다 '식구란 무엇인가?' 또는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가 더 생산적인 질문이 될 수 있다. 가족이 제대로 된 가족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혈연주의이고 소유욕이며, 외부 세계에 대한 피해의식이라면 일단 우리는 그 많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가는 '가족'이라는 단어 대신에 '식구' 또는 '주거공동체'라는 용어로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중략…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인간이 극도로 도구화되는 현재의 문명 속에서 '측은지심'을 바탕으로 하는 생태적 공간을 확대해 가고자 한다. 이것은 곧 '체험으로서의 모성'을 살려내는 프로젝트다. 우리는 그런 모성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앞으로 얼마간 아이 낳기를 유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에 나온 아이들과 생명체들을 함께 기르기 위해, 아이를 낳을 생각을 하기 전에 아이가 태어나도 좋을 만한 곳으로 세상을 회복시켜 놓기 위해서 말이다.

'지구상에 살아남기 위하여', 조형 박혜란 조한혜정 또하나의문화 창립 동인들,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

◆ 가족구성원의 인권과 개성, 공동체적 삶 보장되지 않으면 사회 위기

'선(先) 가정 보호, 후(候) 사회복지' 원칙은 외형상으론 전통적 가치와 우리 국민들의 규범의식에 합당한 듯 하나, 이는 가족을 보호하기보다는 국가의 사회복지 책임을 개별가족에게 전가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중략… 가족은 자율적이며 자생적인 집단임을 전제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사생활의 영역이라는 미명 아래 방치한다면 가족의 위기가 전체 사회의 위기로 발전되고 말 것이다 …중략…단일한 가족형태만을 고집한다면 갈수록 다양해지는 개개인의 욕구와 사회적 요구 모두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당면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심화시킬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가족성원의 개별적 욕구가 존중되고 그들의 선택이 반영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적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가족의 변화와 미래, 그리고 페미니즘', 이재경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교수, <가족의 이름으로>(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

◆ 가족의 변화 속에서도 '함께함'과 '공유'의 원칙은 지켜져야

기성세대가 전통적 유교가치관으로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2,30대 젊은층은 이성애보다는 평등을 기반으로 한 우애적 동지관계여야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젊은층의 자녀들이 후에 성장해 새로운 가족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들 부모들의 역할을 모델로 해서 지금보다 확실히 좀 더 평등적이고 수평적인 부부관계와 부모 자녀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가족행복 중심에서 개인행복 중심으로 사회가 옮겨가면서 개인의 행복이 곧 가족의 형태를 결정짓는 잣대가 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가족형태가 출현하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 됐다. 다양한 가족에 맞는 다양한 가족규범이 생겨나야 하겠지만,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함께 함'과 '공유'는 꼭 지켜져야 할 가족의 기본 가치이자 규범이다. (가부장 중심의 기존 전통과 통념에서 비롯된) 가족신화를 탈피해 21세기에 맞는 건강한 가족문화와 관계맺기를 위해 가족 '교육' 역시 꼭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이동원 (사)가족아카데미아 공동대표(가족사회학자)

임인숙 기자isim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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