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이태 전 고등학교 동창회를 미국에서 연 적이 있었다. 400명 남짓이던 졸업생 중 미국에서 거주하는 동창이 100명이 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워낙 긴 일정이라 한국에서 떠난 일행은 대부분 전업주부들이었다. 아이들을 다 키워 결혼까지 시킨 경우가 대부분이라 집을 떠나는데 별 부담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현모양처들이었다. 살림만 30년 이상을 해온 프로주부들이었다. 반면 미국에서 사는 동창들은 거의 모두 바깥 일을 해온 여성들이었다. 전문직이든 자영업이든 상관 없이 이민오던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낯선 나라에서 뿌리를 내린 강인함이 온몸에서 풍겼다. 거기 비하면 한국에서 간 전업주부들은 온실 속에서 자라난 화초 같은, 조금은 연약하다는 인상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열흘 넘어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그들이 어떻게 그토록 얌전하게 주부노릇을 해올 수 있었는지 참으로 미스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교양 있는 중년주부라는 하나의 색깔을 보여주었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하나 하나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나고 마는, 이른바 못 말리는 끼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끼는 공식적인 동창회에서 폭발했다. 50대 중반의 주부들이 보여주었던 프로그램 기획과 진행솜씨, 춤, 촌극, 그리고 노래는 정말 경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준비해 온 의상의 완벽함이라니. 그 동안 보아온 웬만한 사회단체의 프로그램은 여기 비하면 유치원의 재롱잔치에 불과했다.

아까웠다. 이렇게 능력 있는 여성들이 가족이라는 좁은 울타리 속에서 반평생을 갇혀 지내왔다니 정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들이야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들인데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말이냐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난 아깝고 또 아까웠다.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 갇힌 아까운 여자들

우리는 모든 여성들의 삶의 목표가 현모양처였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다. '현모양처가 꿈이에요'라는 말은 실은 '현모양처가 밥이에요'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현모양처 이외의 꿈을 꾼다면 밥은 저만치 도망쳐버리고 말리라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진짜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혹시 다른 꿈을 꾸고 싶다는 욕망, 다른 말로 끼가 꿈틀거리기라도 하면 당황해서 얼른 뭉개버리기 바빴다.

밥이 꿈이었던 시대를 지나

그렇다면 남자들은 꿈을 꾸며 살았느냐고? 물론, 어림도 없었지. 그들도 그저 밥이 꿈이었던 척박한 시대를 살아왔다는 점에서 다 불쌍한 인간들이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큰 밥그릇을 차지하면 유치하게 거들먹거리긴 했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그래도 부모세대는 무얼하고 살까에 대한 갈등이 없었으니 차라리 그 시대가 좋았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지금은 선택지가 너무 많은 탓에 그만큼 불확실성도 높고 불안하기만 하다고 투덜댄다. 허, 참, 새장 속의 새를 부러워하다니.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의 꿈은 10억 만들기라는 말도 있던데, 그렇다면 우리 때와 달라진 것도 없는 셈이네.) 우리 또래들은 남자나 여자나 자신 속에 숨은 끼를 발휘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서 대충 밥은 다 먹고 살았지만 이만큼 이르고 보니 못 이룬 꿈에 대한 아쉬움도 크다. 그러니 부모들로서는 자식이 그 꿈을 이루어 줄 때 어느 정도 충족감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다. 물론 자식에게 그걸 강요한다면 안 되겠지만.

지난 주말, 아들의 콘서트에 갔다. 노래를 부르며 행복해 하는 아들의 모습은 늘 나를 행복하게 한다. 자신의 꿈으로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부럽기만 하다.

이번 콘서트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노래라며 송창식의 '사랑이야'를 레퍼토리에 넣었다. 그리곤 콘서트 마지막 날 아버지를 무대에 초대해서 함께 그 노래를 불렀다. 뜻 밖의 이벤트였다. 아들과 눈을 맞추며 열창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의 누를 수 없는 끼를 새삼 확인했다. 이 남자도 참 아까운 인물이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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