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방정환 어린이날 선언 100주년]
어린이 인권 존중 않고 차별·폭력 난무
‘잼민이’도 조롱·비하의 의미로 사용 확산
새롭게 떠오른 어린이 차별 표현 ‘금쪽이’
전문가들 “어린이는 미숙한 존재란 생각 강화”

O린이, 잼민이, 금쪽이 등 아동 차별 표현을 TV·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백파더: 요리를 멈추지 마!’, ‘JTBC Voyage’, ‘KBS Kpop’ 캡처
O린이, 잼민이, 금쪽이 등 아동 차별 표현을 TV·유튜브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진=‘백파더: 요리를 멈추지 마!’, ‘JTBC Voyage’, ‘KBS Kpop’ 캡처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으로 존중되며, 아름답게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는다.”<'어린이헌장', 1957년>

소파 방정환 선생이 제정, 선포한 어린이날이 5일로 100주년을 맞았다. 어린이날은 어른으로부터 '애, 애들, 계집애' 등으로 불리던 어린이의 존엄성과 지위 향상을 위하고, 어린이들이 올바르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 정한 날이다. 1921년 방정환, 김기전 선생 등이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했고, 이 천도교소년회가 1922년 5월 1일 창립 1주년을 기념해 경성 시내에서 '어린이의 날' 가두 선전을 한 것이 어린이날의 시초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은 지금도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여전히 존엄성을 인정 받지 못하고 어른에 의한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주린이’(주식 투자 초보), ‘등린이’(등산 초보), ‘골린이’(골프 초보) 등 ‘O린이’와 함께 ‘잼민이’, ‘금쪽이’ 등 어린이 차별 표현이 난무하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O린이’는 특정 분야의 부족함을 나타내는 의미로 최근 부쩍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부에서 지난해 5월 국가인권위원회에 '방송이나 인터넷 등에서 자주 쓰이는 O린이 표현이 아동에 대한 차별적 표현'이라는 진정을 제기했지만, 인권위는 구체적인 인권침해 피해자나 피해사례가 특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인권위는 그러나 지난 3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에게 '공공기관의 공문서·방송·인터넷 등에서 ‘O린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도록 관련 홍보·교육·모니터링 등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라'는 의견을 표명했다.

왜 하필 ‘O린이’? “어린이를 미숙한 존재로 낮춰 봐서”

조사 결과 어린이들은 ‘O린이’ 등의 용어에 비하의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했다. 4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500명을 상대로  ‘O린이’ 등의 용어를 쓰는 어른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물었더니 ‘어린이를 존중해주세요’(25.6%, 이하 중복 응답)가 1위로 나타났다.  다음은 ‘어린이도 똑같은 사람입니다’(23.8%), ‘어른들도 한때는 어린이였습니다’(23.0%)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어린이를 빗댄 표현 중 비하의 의미가 담겼다고 생각하는 용어로는 ‘잼민이’(개념 없는 행동을 하는 어린아이, 70.2%)가 가장 많이 꼽혔다. 다음은 ‘급식충’(65.8%), ‘초딩’(51.0%) 순이었다. ‘O린이’도 어린이를 깔보는 용어로 여기는 아동이 적지 않았다.

이런 말이 사용되는 이유로는 ‘어린이 중 유독 철이 없고 막말하는 아이들이 있어 쓰이는 것 같다’는 의견이 35.8%로 가장 많았다. ‘어린이를 미숙하고 부족한 존재로 보는 표현’이라는 응답도 23.0%였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조사 결과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린이를 미숙한 존재로 낮춰 보기 때문에 다양한 신조어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며 “우리 사회가 미숙한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는 단어 속에 아이들에게 가하는 언어폭력의 소지는 없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잼민이’도 조롱·비하의 의미로 확산

유튜브에서 ‘잼민이’를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 제목. ⓒ유튜브 화면 캡처
유튜브에서 ‘잼민이’를 검색하면 나오는 영상 제목. ⓒ유튜브 화면 캡처

어린이 비하의 의미로 쓰이는 또 다른 표현은 ‘잼민이’다. '잼민이’는 생방송 서비스 트위치(twitch)의 기부 플랫폼인 투네이션에 기부했을 때 나오는 목소리의 주인공 이름인 ‘재민’을 따서 만든 표현이다. 처음 생겨났을 때는 단순히 초등학생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점차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거나 민폐를 끼치는 어린이 혹은 사람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됐다.

조롱과 비하의 의미가 강해지자  ‘잼민이’라는 표현을 자제하자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 지난해 7월 EBS가 공식 SNS에서 ‘잼민좌’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때 ‘교육방송인 EBS에서 잼민이라는 표현을 쓰냐’며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SNS나 유튜브 등 다양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잼민이’는 흔하게 쓰인다.

‘잼민이’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도 ‘O린이’와 비슷했다. 유니세프아동의회 아동정책제안서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사용하는 ‘잼민이’라는 표현은 어린이의 미숙함을 조롱하는 것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청소년 단체인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지난해 5월 “‘잼민이’, ‘O린이’는 어린 사람을 미숙하고 불완전하다고 여기고, 무시하고, 비하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엄연한 혐오 표현”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새롭게 떠오르는 어린이 차별 표현 ‘금쪽이’

최근엔 ‘금쪽이’도 어린이 차별 언어로 떠오르고 있다. ‘금쪽이’는 육아 프로그램에서 어린이를 ‘금쪽이’로 지칭하면서 널리 쓰이게 된 표현이다. 하지만 어원과 달리 근래엔 인터넷상에서 어리광을 피우거나 고집을 부리는 등 말썽을 피우는 사람을 ‘금쪽이’라고 표현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고완석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옹호팀장은 “무슨 표현이든 어떤 취지로 사용되는지가 중요하다”면서 “기본적으로는 좋은 의미를 가진 ‘금쪽이’가 그같이 사용되는 건 문제”라고 말했다. 국제아동인권센터 엄문설 선임연구원도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금쪽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동 차별 표현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고완석 팀장은 “사회가 아동을 비하해도 되는 존재, 차별해도 되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동 차별 표현이 반복적으로 생겨나고 사용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동차별표현은)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자아상을 심어줄 수 있고, 아동 차별이 세대 간 차별, 젠더 간 차별로 확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엄문설 선임연구원도 “아동 비하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아동의 행동에 맥락이 있음에도 이를 무시하게 된다”고 우려를 표했다.

신지영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언어에 의해 이데올로기가 고정될 수 있다”며 “아동 차별 표현은 어린이가 미숙한 존재라는 생각을 강화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른이 어른답지 못하기 때문에 아동 차별적 표현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꼬집으며 “정말 어른이라면 어린이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어린이들의 관점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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