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에 사라진 전주 ‘선미촌’
문화재생으로 집결지 폐쇄 첫 사례
전주시, 2014년부터 점진적 개발 추진
민관협력 성평등·청년 사회혁신 거점공간 조성
성착취 공간이 성평등 거점·예술창작 공간으로

전주시 서노송동 성매매집결지 선미촌이 ‘여성이 행복한 길’로 변했다. 2021년 9월 30일 열린 ‘선미촌리빙랩 여행길 콘서트’ 현장. ⓒ성평등전주 제공
전주시 서노송동 성매매집결지 선미촌이 ‘여성이 행복한 길’로 변했다. 2021년 9월 30일 열린 ‘선미촌리빙랩 여행길 콘서트’ 현장. ⓒ성평등전주 제공
선미촌에 들어선 지역 성평등 플랫폼 ‘성평등전주’에서 열린 ‘성평등 소셜 다이닝’ 현장. ⓒ성평등전주 제공
선미촌에 들어선 지역 성평등 플랫폼 ‘성평등전주’에서 열린 ‘성평등 소셜 다이닝’ 현장. ⓒ성평등전주 제공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물왕멀2길 일대. 악명 높던 성매매집결지 ‘선미촌’은 사라졌다. 그 많던 유리방은 다 철거되거나 리모델링됐다. 미술관, 갤러리, 동네서점, 공예 공방이 생겼다. 흰 팥배나무꽃과 수국이 핀 도시정원이 싱그럽다. 지나가던 이들이 연신 사진을 찍는다.

선미촌은 70여 년간 전북 대표 성매매집결지였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성매매 업소 85곳이 성업했지만 2021년 12월 모두 폐업했다. 이젠 지역의 성평등 활동 거점,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변하는 중이다. 새 이름도 생겼다. ‘여행길’, ‘여성이 행복한 길’이다.

“작년 가을밤 여기서 ‘여행길 콘서트’를 열었어요. 여성 예술인들이 노래하고 춤을 췄죠. 성구매자가 찾아오던 골목에서 여성인권을 위한 공연이라니... 감동해서 목소리가 다 떨렸던 기억이 나요.” 여성인권 관점으로 선미촌을 재정비하는 데 앞장서 온 조선희 성평등전주 소장의 말이다.

“이곳 주민들은 오랫동안 ‘동네 문화’를,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어요. 자식들 결혼할 때 여기 산다고 말 못 했다는 분, 버스에서 내려서 차마 가로지르지 못해 빙 돌아서 집에 갔다는 분도 있고요. 2015년 ‘성노동자의 날’ 성매매 업소들이 하루 휴업하면서 거리가 어두컴컴해지자 그제야 동네에 가로등이 없다는 걸 알았다는 주민도 있었죠. 이젠 주민들이 안전하게 쉬고 놀고 잔치도 여는 공간, 여성이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갈 겁니다.”

2021년 11월 17일 선미촌 내 시티가든(기억공간) 등 물왕멀2길 일원에서 열린 ‘여행길 주민잔치&플리마켓’ 현장. ⓒ성평등전주 제공
2021년 11월 17일 선미촌 내 시티가든(기억공간) 등 물왕멀2길 일원에서 열린 ‘여행길 주민잔치&플리마켓’ 현장. ⓒ성평등전주 제공
4월30일 기자가 찾은 선미촌 일대. 성매매집결지에서 지역의 성평등 활동 거점,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변하는 중이다. 곳곳에 유리방, 다닥다닥 붙은 쪽방 등 성매매 업소 흔적이 남아있다.  ⓒ이세아 기자
4월30일 기자가 찾은 선미촌 일대. 성매매집결지에서 지역의 성평등 활동 거점, 문화예술 창작 공간으로 변하는 중이다. 곳곳에 유리방, 다닥다닥 붙은 쪽방 등 성매매 업소 흔적이 남아있다. ⓒ이세아 기자
4월30일 기자가 찾은 선미촌 초입의 기억공간(시티가든). ⓒ이세아 기자
4월30일 기자가 찾은 선미촌 초입의 기억공간(시티가든). ⓒ이세아 기자

선미촌은 전국 성매매집결지 정비사업 중에서도 주목받는 모델이다. 민·관이 뚝심 있게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해 성매매집결지를 퇴출한 첫 사례다. 2021년 10월 ‘도시재생 사례공유 발표대회’에서 최우수상(국토교통부장관상)을 받았다.

일방적인 철거도, 민간 자본 개입도 없었다. 끈질긴 행정 의지와 민관 거버넌스가 비결이다. 전주시는 2014년부터 선미촌 일대(2만2760㎡)를 대상으로 문화재생 사업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을 추진했다. 2015년 8월 서노송예술팀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2017년 선미촌 한복판에 ‘현장시청’ 사무실을 열었다. 2020년까지 83억원을 들여 토지와 건물을 매입해 ‘성평등전주’, ‘새활용센터다시봄’, ‘뜻밖의미술관’ 등을 설립했다. 가로수를 심고 도로와 골목도 정비했다. 여성자활지원조례를 제정해 여성들의 탈성매매를 돕고, 선미촌 입주 문화·예술 창작자 지원에도 힘썼다.

여성단체 활동가, 예술인, 도시재생전문가,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선미촌정비민관협의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 소장이 협의회가 출범한 2014년부터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 소장은 선미촌의 변화에 앞장선 공로로 지난 2월 ‘2021 정부혁신유공 정부포상 전수식’에서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2018년 9월 5일 선미촌 인근에서 김승수 전주시장과 선미촌 문화재생사업 관련 공무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 행정협의회 워크숍’이 열렸다. ⓒ전주시 제공
2018년 9월 5일 선미촌 인근에서 김승수 전주시장과 선미촌 문화재생사업 관련 공무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서노송예술촌 프로젝트 행정협의회 워크숍’이 열렸다. ⓒ전주시 제공
전북 전주시가 2021년 10월 29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도시재생 사례공유 발표대회’에서 선미촌 문화재생 프로젝트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사진은 상을 받고 있는 김승수 전주시장(오른쪽). ⓒ전주시 제공
전북 전주시가 2021년 10월 29일 경남 창원에서 열린 ‘도시재생 사례공유 발표대회’에서 선미촌 문화재생 프로젝트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사진은 상을 받고 있는 김승수 전주시장(오른쪽). ⓒ전주시 제공
전주시 선미촌정비민관협의회(위원장 조선희)는 3월 24일 성평등전주에서 ‘2022년 정기총회 및 사업 공유회’를 개최했다. 김승수 전주시장과 조선희 위원장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주시 제공
전주시 선미촌정비민관협의회(위원장 조선희)는 3월 24일 성평등전주에서 ‘2022년 정기총회 및 사업 공유회’를 개최했다. 김승수 전주시장과 조선희 위원장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주시 제공
4월 30일 전주시 서노송동 성평등전주에서 만난 조선희 성평등전주 소장.  ⓒ이세아 기자
4월 30일 전주시 서노송동 성평등전주에서 만난 조선희 성평등전주 소장. ⓒ이세아 기자
4월30일 찾은 선미촌 도시정원. 허물어진 업소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흉물이니 허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인권교육 용도로 남겨뒀다.  ⓒ이세아 기자
4월30일 찾은 선미촌 도시정원. 허물어진 업소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흉물이니 허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인권교육 용도로 남겨뒀다. ⓒ이세아 기자

선미촌 곳곳엔 성매매집결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도시정원은 허물어진 업소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흉물이니 허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인권교육 용도로 보존하고 있다. 갤러리, 공방도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방, 1~2평 규모 쪽방이 다닥다닥 붙은 구조 그대로다. 성평등전주도 전주시가 매입한 다섯 번째 업소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성 착취 공간이 성평등 플랫폼이 된 셈이다.

사실 성평등전주는 여성들이 싸워 얻은 공간이다. 행정안전부의 공모사업인 ‘지역거점별 소통협력공간 조성사업’에 선정돼 2019년 12월 개관했다. “여성단체들은 이 공간이 생긴다는 걸 2017년 선정 발표 후에야 알았어요. 선미촌 재구성 사업에서 여성이 배제된 거죠. 저랑 송경숙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장 둘이 비집고 들어가서 단체들과 공무원들을 설득했어요.” 결국 ‘청년과 여성이 주체가 되는 사회혁신’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현재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성평등전주)와 우깨컴퍼니(청년중심 플랫폼 ‘사회혁신전주’)가 각각 공간을 수탁 운영 중이다. 조 소장은 “성평등전주는 성평등 의제를 사회혁신 의제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예산과 인력을 가진 조직이라 민관 거버넌스에서도 더 영향력을 갖게 됐다”고 했다.

올해로 개관 3년째. 5개 조직과 공유사무공간 사용 활동가 3명이 입주해 활동 중이다. 일상 속 다양한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이들을 돕는 ‘선미촌 리빙랩’ 지원사업, 전북 지역의 일상 속 성차별 문제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성평등 생활연구 지원사업’, 다양한 지역 공동체 활동을 돕는 ‘성평등 커뮤니티 지원사업’을 올해도 이어간다. 2020년부터 매년 ‘페미니즘 예술제’도 열고 있다. 페미니즘 열기가 높아지면서 시민들의 참여도 늘고 있다. 지원사업을 계기로 만난 활동가들 간 네트워킹도 활발하다.

반페미니즘 공격에도 꿋꿋하게 대응해왔다. ‘페미니즘 예술제’ 명칭을 두고 공무원이 문제를 제기하자, ‘페미니즘’이 이름에 들어간 전국 행사 정보를 모조리 찾아서 보냈다. 센터 이름을 ‘양성평등 전주’로 바꾸라는 항의에는 ‘양성평등보다 성평등이 훨씬 진보적인 개념’이라며 설득했다.

전주시 서노송동 성평등전주 외관과 1층 선미촌 아카이브 전시관. ⓒ성평등전주 제공
전주시 서노송동 성평등전주 외관과 1층 선미촌 아카이브 전시관. ⓒ성평등전주 제공
성평등전주가 개최한 2021년 첫 번째 ‘선미촌 리빙랩 사업’에는 청년·여성·예술가·다문화 등 7개 팀이 참여했다. 성매매 업소를 리모델링해 그해 11월까지 판매와 전시, 공연, 문화체험 프로그램 등을 선보였다. ⓒ성평등전주 제공
성평등전주가 개최한 2021년 첫 번째 ‘선미촌 리빙랩 사업’에는 청년·여성·예술가·다문화 등 7개 팀이 참여했다. 성매매 업소를 리모델링해 그해 11월까지 판매와 전시, 공연, 문화체험 프로그램 등을 선보였다. ⓒ성평등전주 제공

선미촌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이다. 올해부터 도시재생사업 2단계 사업 방향을 논의 중이다. 더 많은 이들이 찾아올 수 있는 거점 공간을 만들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지역 주체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행안부의 성평등전주 공간 지원은 올해가 마지막이라 내년부터는 여러 자체 대관 사업, 후원 등으로 운영비를 마련해야 한다. 차기 시장이 누가 되느냐도 중요한 변수다. 여성인권 관점의 선미촌 재정비와 지역 풀뿌리 민주주의 확산에 힘써온 김승수 전주시장이 6.1 지방선거에 불출마하면서 지역 단체들은 이미 향후 지원 축소를 우려하고 있다. 

조 소장은 “정답은 없다. 애초부터 공무원, 시민단체, 지역 주민의 의견이 제각각이다. 치열한 토론과 협상을 거치며 나아가고 있다”고 했다. 또 “그간 전북 지역 여성운동가들은 투쟁뿐만 아니라 설득, 협상, 연대 등 다양한 전략과 전술을 고민하고 실행하며 사회 변화에 앞장서 왔다. 성평등전주에서 함께할 젊은 여성운동가들에게도 지금의 과정이 소중한 학습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