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늘 넉넉했던 용기와 지혜의 여장부
[나의 엄마 이야기] 늘 넉넉했던 용기와 지혜의 여장부
  •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 승인 2022.04.24 13:44
  • 수정 2022-04-24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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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엄마 고(故) 여주임 여사
30년 전쯤 어느 봄날. 꽃 속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제공
30년 전쯤 어느 봄날. 꽃 속에서 포즈를 취했다.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제공

15년 전 돌아가신 나의 엄마 고 여주임 여사(1928~2007)는 만사를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참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못하는 것이 없는 팔방미인인데다, 여장부 기질의 강단 있는 여성이셨다. “우리 엄마, 진짜 대단해. 나 같으면 그렇게 못해.” 요즘도 언니들과 엄마 얘기를 할 때면 우리는 이 같은 감탄사를 연발하곤 한다.

2남3녀의 자녀들에게 엄마는 무엇보다 “같이 공부하는 엄마”였다. 자식들이 공부하면 엄마는 옆방에서 바느질하거나 조용히 집안일을 하셨다. 오남매를 키웠으니 그 세월이 30년. 언제나 한결같았다. 학교급식이 없었던 시절이라 여러 개의 도시락을 싸기 위해 새벽 4~5시면 일어나셨다.

겨울에는 직접 솜을 누벼 만든 보온 주머니에 도시락을 넣어 주셨다. 보온 밥솥이 없던 시절에도 나는 찬밥을 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식구들 귀가가 늦기라도 하면 밥그릇 하나가 쏙 들어갈 크기의 패딩 주머니를 만들어 밥그릇을 넣은 뒤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두었다가 밥상에 올려주셨다. 보온 주머니에서 밥그릇을 꺼낼 때면 “앗, 뜨거”라고 할 정도로 따끈하고 야들야들하고 차진 밥맛은 지금도 내 혀끝에서 아련하다.

필자의 대학 졸업식 때 세 딸들과 함께.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제공
필자의 대학 졸업식 때 세 딸들과 함께.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제공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남들은 돈 많은 것을 자랑하지만 나는 자식 훌륭하게 되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다”고. 온통 자식 뒷바라지에 쏟아부은 지극정성 덕분에 오남매는 대체로 공부를 잘했는데 이는 평생 엄마의 자긍심의 원천이었다.

엄마는 알뜰함과 검소함이 몸에 밴 찰진 살림꾼이셨다. 쓸고 닦고 씻고 다리고 챙기느라 언제나 분주했다. 어릴 적 나는 냄비나 제기용 놋그릇이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인 줄 알았다. 얼굴을 비추면 그릇의 곡면에 따라 굴절되는 얼굴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는데, 그 반들거림이 극한 노동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고선 마음이 아렸다.

요리할 때면 계량스푼이나 저울이 필요 없었다. 눈대중으로도 언제나 간이 딱 맞았다. 인심도 후해 우리 집 간장·된장·고추장과 김장김치를 맛보지 않은 이웃이 별로 없었다. 밤참은 가지각색으로 참 많이도 만들어주셨다. 바짝 말린 고구마와 팥을 푹 삶아 만든 범벅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엿기름을 듬뿍 넣은 달콤하고 구수한 식혜는 겨울철이면 서걱서걱하게 얼어 짜릿함을 더했고, 여름철엔 미꾸라지 대신 바닷장어에 고사리 등을 넣고 끓인 장어탕으로 식구들은 불더위를 이겨냈다. 그걸 먹이느라 엄마는 펄펄 끓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땀을 한 바가지씩 흘렸다. 철들면서부터는 이제 그만 하시라고 말리고 타박도 많이 했지만, 막상 해주시면 배불리 먹고 좋아라 했으니 나는 엄마 앞에선 언제나 철들지 못한 딸이었나 보다.

바느질 솜씨도 일류였다. 여름이면 여문 손끝으로 삼베나 모시 적삼을 만들어 풀을 먹이고 파르르하게 다림질을 한 뒤 양친이 차려입고 맵시를 냈다. 천 조각 하나도 허술하게 버리지 않고 조각조각 이어 붙여 밥상보나 홑이불을 만들어 집마다 돌렸다. 남은 천을 이용하다 보니 네 귀퉁이 중 어느 하나는 색감이나 모양이 어긋나곤 했는데, 그 엣지있는 디자인의 푸근함과 정감이란!

나이아가라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녀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할 때면 엄마는 음식이나 잠자리에 대해 일절 군소리가 없었다. “다음에 안 데리고 갈까봐”라고 말해 우리를 웃기곤 했는데 젊은 손자들과도 잘 어울리는 지혜로운 할머니였다.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제공
나이아가라폭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자녀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할 때면 엄마는 음식이나 잠자리에 대해 일절 군소리가 없었다. “다음에 안 데리고 갈까봐”라고 말해 우리를 웃기곤 했는데 젊은 손자들과도 잘 어울리는 지혜로운 할머니였다.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제공

엄마는 50대 중반에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막내딸까지 대학에 입학하고 경제적 형편도 나아졌을 무렵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어쩔 수 없이 사업을 물려받아야 했는데 억척스러운 여장부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엄마는 아버지 생전엔 어깨너머 곁눈질만 했을 뿐 실제로 아버지 사업에 관여한 바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때보다 규모를 키우는 위력을 보였다. 80년대 초반, 한국 경제의 난기류 속에서 열악한 중소기업의 환경을 감안하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와 금실이 좋으셨다. 일제의 ‘처녀 공출’을 피하려고 신랑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소위 ‘구식 부부’였지만 의가 잘 맞아, 자라는 동안 나는 엄마 아버지가 큰소리 한번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도 항상 엄마를 존중하고 대소사를 반드시 의논하셨던 것 같다. 그토록 사이좋은 부부가 헤어지는 아픔이 더할 나위 없이 컸을 텐데 내가 보기에 엄마는 참으로 꿋꿋하셨다.

엄마의 지혜와 위기 대처 능력,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엄마로부터 어려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용기와 의연함, 그리고 살아있는 지혜를 배웠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요즘 제철 맞은 쌉싸름한 봄나물을 데치면서도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뜨거운 물을 하수구에 버릴 땐 꼭 찬물 한 바가지를 같이 부어야 한다”고 엄마는 당부하셨다. 눈에 보이지는 않는 작은 생명체가 뜨거운 물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작은 생명도 귀히 여겼던 엄마의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코로나 팬데믹과 생태 위기를 겪으면서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면모는 또 있다. 내 어린 시절엔 집마다 밥 동냥을 하러 다니던 거지가 많았다. 엄마는 우리 집에 온 거지들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집 마당에는 평상같이 평평한 바위가 있었는데 꼭 그곳에 앉혀서 밥을 먹여 보냈다. 돈이나 먹을 것을 전할 때도 두 손으로 공손히 주고 오라고 시켰다. 가장 작은 자, 가장 힘없는 자를 동등하게 대하던 엄마의 자세는 생각할수록 옷깃을 여미게 한다.

엄마의 삶을 반추하면서 나는 흠칫 놀라곤 했다. 대학 졸업 이후 쉬지 않고 사회 일을 해온 나로서는 엄마와 매우 다른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대면해온 삶의 장면들에서 엄마가 겨뤘던 삶의 굴곡들과 유사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추구해온 세상과 가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엄마의 삶의 태도와 마음가짐 속에서 나는 나를 설명해 줄 실마리 같은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미로를 더듬어갈 실타래라고나 할까. 역시 나는 엄마의 딸이었다.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홍수형 기자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 ⓒ홍수형 기자

문경란 경찰청인권위원장은

중앙일보 여성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초대 서울시 인권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장을 지냈다. 여성, 장애인, 난민, 스포츠인권 분야에서 인권전문가로서 활약하고 있다. 『우리 곁의 난민』 등 네 권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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