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보라 작가·번역가
호러·SF·판타지 분야서 활약
‘3대 문학상’ 부커상 최종 후보
슬라브어권 문학 번역·강의도
소수자 인권에 관심 많아
“글 안 써지면 데모하러 간다”
차기작은 “여자들이 남자 죽이는 판타지”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를 7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 부근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를 7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 부근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한국 여성의 작품이 또 한 번 ‘세계 3대 문학상’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2016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수상하며 잘 알려진 상이다.

주인공은 정보라(46) 작가. 장르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선 “믿고 보는 작가”로 통한다. 부커상 후보작 『저주토끼』(2017)는 호러 SF/판타지 단편집이다. 저주와 복수에 얽힌 서늘한 이야기 10편을 모았다. 2021년 영국에서 번역 출간된 후 현지에서 입소문이 났다. “놀라운 발견”, “가부장제·자본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꼬집는 환상 소설” 등 호평이 많다. 유럽, 아시아, 남미까지 15개국에 판권이 팔렸거나 판매 논의 중이다. 미국 시장에서는 대형 출판그룹 아셰트북그룹(Hachette Book Group)이 판권을 사 갔다. 국내에서도 ‘판매 역주행’을 이어가고 있다.

최종 후보 발표일 “잠도 못 잤다”던 그는 “여전히 남의 일처럼 얼떨떨하다”고 했다. 아작 출판사와 안톤 허(Anton Hur) 번역가에게도 공을 돌렸다. 수상작 발표는 5월 26일이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 국문판(2017, 아작)과 영역판(2021, 안톤 허 옮김, Honford Star). 지난 3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13편)로 지명됐고, 다시 6편으로 좁혀진 최종 후보에 뽑혔다. ⓒ아작/Honford Star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 국문판(2017, 아작)과 영역판(2021, 안톤 허 옮김, Honford Star). 지난 3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13편)로 지명됐고, 다시 6편으로 좁혀진 최종 후보에 뽑혔다. ⓒ아작/Honford Star

소설 쓰고, 번역하고, 강의도 하는 다재다능한 작가다. 연세대 인문학부, 미 예일대 석사(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인디애나대 박사(슬라브 문학)를 거쳐 2010년부터 올 초까지 연세대 러시아어문학과에서 연구·강의를 했다.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도 맡고 있다.

“본질은 호러 작가”다. “어둡고 마술적인 이야기들, 불의하고 폭력적인 세상에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1998년 첫 단편 ‘머리’로 학내 문학상을 탔다. 변기를 내려간 오물이 인간의 형체를 이뤄 주인을 변기에 처넣고 대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2008년 계간 ‘판타스틱’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장편 『문이 열렸다』, 『죽은 자의 꿈』, 『붉은 칼』, 단편집 『왕의 창녀』, 『씨앗』, 『그녀를 만나다』 등을 펴냈다. 2000년부터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러시아 문학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의 대표작 『거장과 마르가리타』, 구소련 SF작가 이반 예프레모프의 『안드로메다 성운』 등 슬라브어권 문학 작품을 다수 옮겼다.

어떻게 쓸까. “결말이 떠오르면 첫 문장을 찾는다. 그 사이를 채운다.” 이야기가 떠오르면 몰입한다. 단편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이틀이나 사흘이 걸린다. 장편을 쓸 땐 “단편을 10개 쓴다고 생각하면 쓸 만하다.” 일반적인 상황과 반대로 생각해보기, 논문 읽기, 잘 쓰는 작가들의 소설을 읽고 번역하는 작업도 도움이 된다.

정보라 작가가 2021년 펴낸 단편집 『그녀를 만나다』(아작) ⓒ아작
정보라 작가가 2021년 펴낸 단편집 『그녀를 만나다』(아작) ⓒ아작

차별과 폭력에 대한 분노,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 잃을 수 없는 희망은 그가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원천이다. 지난해 단편집 『그녀를 만나다』에 그런 소설을 모았다. 고(故) 변희수 육군 하사를 향한 성소수자 혐오와 그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언급한 표제작,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이야기 ‘Maria, Gratia Plena’ 등이다.

글이 잘 안 써질 땐 “데모를 한다.” 그의 자기소개에 빠지지 않는 얘기다.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많다. 연세대 총여학생회에서 활동했고, 폴란드 유학 중 아프가니스탄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데모꾼”으로 거듭난 건 2013년 12월 철도 민영화 반대 시위 즈음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등 저항운동이 확산하던 시기다.

이듬해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정 작가는 광화문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과 함께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등급제 폐지 시위에도 갔다. 2020년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위한 오체투지에도 동참했다. 인터뷰 날(7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10일엔 ‘낙태죄 폐지’ 1주년 시위 현장에서 기자와 스쳐 지나갔다.

“활동가가 되려는 건 아니에요. 조용히 연대하는 거예요.” 가장 낮은 곳에서도 서로 돕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창작의 영감도 얻는다. “시위대의 자유발언을 듣다 보면 언제나 누군가가 굉장히 마음에 박히는 말을 해요. 저로선 상상도 못 했던 세상의 이야기도 듣고요. 나도 저렇게 세상을 바라봐야겠다, 저런 분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부터 출발해요.”

“세상이 당장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누군가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누군가 앞에서 나는 최소한 부끄럽지 않고 싶다.” (『그녀를 만나다』 ‘작가의 말’ 중)

“다 시위하러 갔다가 받은 거예요.” 정보라 작가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시위를 하며 받은 노란 팔찌, 유족에게 받은 노란 신발끈 등 ‘시위 굿즈’로 무장했다. ⓒ홍수형 기자
“다 시위하러 갔다가 받은 거예요.” 정보라 작가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시위를 하며 받은 노란 팔찌, 유족에게 받은 노란 신발끈 등 ‘시위 굿즈’로 무장했다. ⓒ홍수형 기자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를 7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정보라 작가를 7일 서울 종로구 여성신문사에서 만났다. ⓒ홍수형 기자

올해 2월 대학을 떠났다. 코로나19로 부각된 ‘대학의 위기’를 오래 고민했다. 학내 소수자를 배려·포용하지 않는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청각장애인, 비영어권 외국인 학생은 수업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이었다. 별도의 대본과 시청각 자료를 준비해 도왔지만, 비대면 수업 체제에선 그마저도 어려웠고 혼자선 한계였다. “수업의 질에 관심 없는 등록금 장사”, “소설 그만 쓰고 논문 쓰라는 실적주의”가 지속된다면 “미래가 없다”고 봤다.

전업 작가·번역가로 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연구자 정보라와 소설가 정보라를, 제 개인의 삶과 소설을 의식적으로 분리하려 했어요. 이제 매여 있지 않으니 제가 쓰고 싶던 페미니즘, 소수자의 이야기를 더 쓰게 될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할 용기도 조금씩 생겼고요.”

지난해 결혼해 포항에서 살고 있다. 남편은 여러 투쟁 현장에 함께했던 민주노총 경북본부 간부다. 4년간 짝사랑 끝에 이룬 인연이다. 포항에서도 포항여성회, 포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활동에 참여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호러 SF/판타지 창작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을 청했다. “도망치세요.” 모두 웃자 다시 쐐기를 박는다. “안톤 체호프가 남긴 ‘초보 작가를 위한 규범’인데요.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릿속에 강하게 새겨줘야 한다. 글 쓰지 마! 작가가 되면 안 된다! 시를 쓰기도 하는 기차 차장은 일하지 않는 시인보다 더 잘 산다.’ 1800년대 에세이인데 21세기에 들어도 얼마나 명언인지....”

그러면서도 “최근 SF 초보 작가를 위한 신뢰할 만한 입문·멘토링 과정이 늘었다”고 했다. 한국SF어워드, 문윤성SF문학상, 안전가옥 SF 워크숍, 한국과학창의재단 과학스토리텔링 과정 등 여러 프로그램을 추천했다.

차기작은 “여자들이 남자를 죽이는 판타지”다. “고통과 진통에 대한 이야기”도 구상하고 있다.

정 작가는 “이번 부커상 최종후보 선정으로 한국 장르문학의 작품성을 증명하게 돼 영광”이라며 “다른 한국 SF 작가들도 더 많이 번역되고 알려지면 좋겠다”고 했다. 김보영 작가의 SF 소설집 『종의 기원』(영역판 On the Origin of Species and Other Stories), 정소연 작가의 ‘The Flowering’을 추천했다.

“작가는 멋있지 않아요. 어떤 작가가 멋있어서가 아니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쓰면 좋겠어요.” ‘작가님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계시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 지경이죠. 아하하.”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