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원 | 문학평론가

우리나라 최초 영화 상영의 기록은 상상보다 이르다. <런던 타임즈> 1887년 10월 17일자 신문에 보면 프랑스 파테사의 단편 실사 필름이 진고개의 중국인 가건물에서 상영됐다고 한다(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로 추정됨). 연초회사가 담배광고를 위해 영화를 이용한 것으로 담뱃갑 세 개를 가져오면 영화를 무료로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직접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기까지는 이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923년 제작된 <월하의 맹서>라는 작품이 최초의 극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에 등장한 이월화라는 배우가 한국 최초의 여배우로 기록된다.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건달들과 어울리며 주색잡기에 빠진 영득을 정순이 헌신적으로 도와 재기시킨다. 정순의 부탁으로 정순의 아버지가 저축한 돈을 찾아 영득의 빚을 갚아주자 저축의 중요성을 알고 개과천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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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저축을 장려하는 계몽영화다. 영화가 완성되자 조선총독부에서 사회의 저명인사 백여 명을 초청해서 경성호텔에서 시사회(1924년 4월)를 열었고, 극장이 아닌 전국의 공공시설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유지나).

한국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

한국 최초의 여배우가 등장한 영화가 저축장려 영화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한국 및 대륙경제 수탈을 위해 금융통제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1911년 조선은행법을 제정해 금융계를 장악한 것이다.

1920년대부터는 그 기구를 중국대륙에 뻗쳐 대륙침략의 경제적 발판으로 삼았다. 즉, 경제수탈을 위해 일제는 저축을 장려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제작된 <월하의 맹서>에서 이월화라는 배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월화는 이 영화의 출현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배우로서 정점에 섰다. 나혜석은 그녀의 감성이 풍부한 연기를 상찬했다.

이월화는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다.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다니던 1918년 신극좌(新劇座)에 여배우로 데뷔했다. 당시 신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그녀는 연극과 영화 관람을 좋아했는데, 그러다가 연극인 김도산과 박승희의 눈에 띈 것이다. 1922년 윤백남의 민중극단 창립동인으로 활동했고, 23년 토월회의 주연여배우가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영화배우가 되었다.

이전에 불완전한 형식으로 제작된 영화에서는 여장을 한 남성이 여성 역으로 등장을 했는데 이월화가 금기의 벽을 깨고 여배우로 데뷔한 것이다. 이후에도 <해(海)의 비곡(悲曲, 1924)> <뿔 빠진 황소(1927)>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나 다른 여배우들의 등장으로 그녀에게 쏟아지던 세인의 관심, 선풍적 인기는 곧 사그라졌고 그녀의 종말은 비참했다.

여배우였던 만큼 그녀를 둘러싼 염문은 끊이지 않았다. 이월화는 어머니와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댄서도 하고 한때 기생도 하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일본계 중국 남자와 연애를 했다. 1933년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려고 한국에 잠시 들렸다가 다시 상하이로 가려던 중 심장마비로 객사했다. 혹은 연극시절에 만난 유부남 박승희의 사랑과 김우연에게 주연을 빼앗긴 후 울분에 찬 생활을 하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여배우의 불행한 사생활, 염문은 그들이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되면서도 끊임없이 순결을 요구하는 가부장적인 이중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월화가 우리 영화사상 최초의 여배우이며, 탁월한 연기력을 가진 배우였음을 기억하는 일이 더욱더 중요하다. 업적은 없고 스캔들만 난무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언제쯤 자취를 감출 것인가.

이번 호를 끝으로 '다시 보는 신여성'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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