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위원회 ‘대선 후보에 말한다’]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여성신문 젠더위원회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맞아 각 당 대선 후보가 발표한 정책 공약을 진단하고 한국사회를 이끌 리더로서 성평등 사회 실현을 위해 반드시 짚어야 정책을 제언한다. <편집자 주>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신임대표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신임대표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의아스러운 장면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때 그 시절의 외침과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고, 목숨까지 걸 가치가 있다는 판단은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지라는 궁금증. 어린 시절 내게 가장 의아스러웠던 것은 독립운동에 목숨바쳤던 수많은 민중들이었다. 양반들이야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라는 계산이 있을 수 있다. 초기 독립운동의 목적은 기존의 조선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조선이 문을 닫고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한들 봉건제는 유지되고 있었고 신분제는 공고했다. 독립이 된다해도 민중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의문은 독재정권 시절의 역사 교과서가 독립운동이 가진 봉건제를 뒤엎은 혁명으로서의 의미를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대한제국은 경술국치로 인해 황제가 주권을 내려놓게 됐다. 이후 민중들은 1919년 3월 1일,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어 4월 1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헌장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선언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주권을 포기했기 때문에 원래의 주권자인 백성에게 이를 양여한 것이라는 주권양여설, 주권재민설이 3.1혁명 이전 여러 선언을 통해 정리되었다. 봉건제와의 결별과 공화제 수립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3.1 독립선언은 이를 최종적으로 확정하면서 새로운 국가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선포한 혁명이었다. 민중들은 봉건제와 결별하고 내가 스스로 주권자가 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기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모든 백성이 주권자라는 생각은 19세기 농민운동과 동학운동을 거치면서 낯설지 않은 주장으로 기반을 다져 왔다. 핍박받던 민중들의 삶에서 터져나온 목소리와 변화를 위한 갈망이 일제의 침략 시기를 거치면서 독립운동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재난의 위험은 불균등하게 분포되며, 소수자와 취약 계층에게 가장 먼저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이들에게 감히, 어떻게 자기돌봄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회적 부정의와 제도적 공백 속에서도 우리는 삶을 이어나가기를 선택했기에, 나는 투쟁과 연대의 한 양식으로서 “급진적 자기돌봄”을 제안하고자 한다.  ⓒPixabay
언제나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은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기존 사회가 이들에게는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기에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차별받는 이들은 차별을 없애는 제도를, 가난한 이들은 국가에 의한 보호를,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권리를 보장할 시스템을,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사각지대를 해소할 대안을 요구한다. ⓒPixabay

 

체제와 인식이 바뀌는 거대한 변화는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이들의 논의와 때로는 처절한 싸움 끝에 비로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시대 가치로 동의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작은 항상 현장의 목소리이다. 내가 딛고 있는 현장에서의 어려움과 분노가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응축된다. 이 목소리가 집단을 형성하고 다수의 행동을 통해 실행되면 변화가 진행된다. 그것이 진보다. 그래서 언제나 사회에서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은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기존 사회가 이들에게는 안전하지도 평등하지도 않기에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차별받는 이들은 차별을 없애는 제도를, 가난한 이들은 국가에 의한 보호를, 권리를 박탈당한 이들은 권리를 보장할 시스템을,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은 사각지대를 해소할 대안을 요구한다.

다양한 목소리가 넘쳐나고 사회가 가진 문제점과 변화방향을 활발하게 논의하는 시기로 대선만큼 적기가 없다. 대선의제는 후보들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각계각층에서 대선정국에서 논의해야 하는 의제들을 긴 시간을 투여해 만들고 이슈화를 위해 노력한다. 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만 해도 공동으로 2021년 초부터 논의를 시작해 1년에 걸쳐 6대 영역의 24개 의제를 정리해 내었다. 전국의 회원과 활동가가 토론하고 고심하며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보다 평등하고, 안전하며, 행복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제안들이다. 제1의제는 탈성장 돌봄중심 사회로의 전환이다. 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은 기후위기의 주범으로 자본주의를 지목했다. 자본주의는 무한 이윤 추구를 위한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성장이라 부르며 자원과 노동자, 여성을 약탈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왔다. 필요 이상의 물건들을 과잉 생산하고 과잉 소비를 부추기며 결국에는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쓰레기와 탄소를 양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강화해 왔다. 여성을 무급돌봄노동자로 확정짓고 모든 돌봄을 여성에게 떠 맡겼다. 돌봄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성들을 가장으로 호명하여 가부장의 권위를 부여하고 장시간 노동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모범 노동자 기준을 24시간 회사의 부름에 대기할 수 있는 노동자로 한정짓고 여성노동자를 2등 노동자로 밀어내 차별을 강화해 왔다. 그러나 이제 여성도 지구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세뇌한 성장지상주의에서 탈피해 그 자리에 돌봄을 위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 의제들은 대선정국 어디에서도 자리 잡지 못 하고 있다. 필요한 논의가 삭제된 채 차별과 혐오, 증오선동의 정치만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차별과 배제를 없애고 평등과 정의가 단단하게 자리잡기 위한 구체적 방안 대신 비방과 혐오만이 넘실대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것은 조직적 백래시다.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이들은 변화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삭제하고 싶어 한다. 타인의 권리를 빼앗아 누렸던 풍요를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다. 백래시를 젠더갈등으로 이름붙이고, 차별은 없다 이야기한다. 여성들이 목숨 걸고 쌓아올린 성평등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페미니스트들은 성평등에 대한 미래 비전을 갖고 이에 대한 열망을 모아 행동을 시작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이 기득권 정치판을 뒤엎는 것. 여성들의 목소리를 더욱 높여내는 것. 지지않고 지치지 않고 더욱 거세게. 일제하에서 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은 죽기를 각오하고 일본인 공장주에 맞서 싸웠다. 이 정신은 면면히 흘러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폭발적 독재와 자본에 대항한 투쟁으로, 25세 결혼퇴직 철폐투쟁으로, 남녀고용평등법 제·개정투쟁으로 이어졌다. 빈곤의 여성화에 저항하는 운동과 미투운동 역시 이 흐름 안에 함께 하고 있다. 이 도도한 흐름은 막을 수 없다. 3.1독립선언이 봉건제를 뒤엎는 혁명이었듯 오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하는 주권자로서의 선언들을 역사는 젠더계급을 뒤엎는 혁명으로 기록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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