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책사 엄창록 이야기
선거의 본질은 대의? 승리?
설경구·이선균 케미 볼 만
20대 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다. 선거판은 각종 논란과 지지율 접전으로 유례 없이 혼란스럽다. 선거에서 우선시해야 할 것은 대의인가, 승리인가. 대의는 누가 결정하는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부당한 수단을 써도 되는가. 영화 <불한당>으로 호평 받은 감독 변성현이 다시 두 남자의 미묘한 관계를 다루는 영화로 돌아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선거전략가 엄창록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킹메이커>다.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를 내세운 젊은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분)의 선거 유세에 감명 받은 서창대(이선균 분)는 무작정 그의 사무실에 찾아가 자신을 기용해달라고 부탁한다. 둘은 첫만남부터 서로 다른 가치관을 확인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힘을 합쳐 김운범의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쾌거를 이룬다.
대의를 앞세우는 김운범의 능력에 서창대의 뛰어난 모략이 더해져 김운범은 단숨에 유망 정치 신인으로 우뚝 서고, 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해 대선주자로 나선다. 치열한 선거전이펼쳐지는 가운데 김운범의 자택에 폭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누구 짓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김운범과 서창대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결국 서창대는 김운범을 떠나 여당에 조력한다. 서창대의 책략은 효과적이었고 김운범은 대선에서 패배한다.
영화 <킹메이커>는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 제 7대 대통령선거를 배경으로 한다. 신민당의 김대중과 그의 책사 엄창록의 실화를 토대로 각색한 영화다. 김대중 전 대통령 자서전에 엄창록에 관한 기술은 몇 줄 되지 않는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타도어의 귀재’, ‘선거판의 여우’라고 불리던 ‘킹메이커’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거를 도왔지만 이내 여당의 편에 섰다고 한다. 김대중과 절연한 뒤 여당의 책략가로 활약하며 지역감정을 조장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 속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나 세부적 사건들은 모두 감독의 재량적 연출이다. 연기력으론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설경구와 이선균의 열연이 돋보인다.
영화는 '고무신·막걸리 선거'라는 말을 실감 나게 한다. 자금이 부족한 야당(신민당)은 여당(민주공화당)의 고무신, 와이셔츠, 설탕 등 선물공세를 이기기 어렵다. 서창대는 여당 행세를 하며 줬던 선물을 빼앗아 재포장해 야당의 선물인 척 배포하는 계략을 꾸민다.
김운범이 빛이면 서창대는 그림자다.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김운범과 북한 출신(빨갱이)이라는 꼬리표때문에 김운범을 드러내놓고 도울 수 없는 서창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솔직하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김운범을 연기하는 설경구는 중후하다. 열정적으로 헌신하면서도 콤플렉스 때문에 자괴감과 열등감을 느끼는 서창대를 연기하는 이선균은 격정적이다.
김운범과 서창대는 대척점에 선 인물이다. 빛과 그림자로 은유 되는 두 인물은 대의와 승리를 상반된 관점에서 바라본다. ‘선거에 지더라도 대의를 지킨다면 의미가 있다’는 김운범은 도리를 우선한다. 서창대는 목적 지향적이며 때론 부도덕하게 그려지는 인물이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대의를 이룰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만큼 옳지 못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승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서창대는 김운범에게 ‘빨갱이’ 프레임으로 맞서는 여당에 대응하려면 ‘더러운 짓’도 불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김운범은 ‘정의가 곧 사회의 질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해 비판하지만, 서창대는 ‘정당한 목적에는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플라톤의 말로 반박한다. 플라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라는 설명과 함께.
오래 된 딜레마다. 대의를 이루기 위해선 부당한 수단도 허락되는가. 애당초 대의는 누가 결정하는가. 극 중 중앙정보부장(조우진)은 “그래도 김운범에겐 ‘대의’가 있었다”는 서창대에게 “내가 모시는 각하의 뜻이 곧 나의 대의입니다”라고 응수한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저마다 지키는 대의가 존재할 때 그것의 정당함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변성현 감독은 “대선 시기에 맞춰 개봉 일자를 조정한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2020년 하반기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19로 불가피하게 개봉 시기가 늦춰졌다는 것이다.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01분. 절찬 상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