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회고전
2월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1953년~1985년 작고하기까지
주요 작품·자료 200여점 한자리에

생전의 최욱경 화백.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생전의 최욱경 화백.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 추상회화의 전설, 저평가된 여성 작가, 페미니스트. 최욱경(1940∼1985) 화백은 불꽃처럼 살다 간 천재요, 이제는 세계 거장들과 나란히 조명되는 작가다.

생전 그의 여의도 화실 벽엔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라는 글귀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시인·화가인 고(故) 김영태씨는 “5피트 2인치(약 157cm)의 작은 키, 43kg의 체중으로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 500호짜리 대작을 그리고 있는 최욱경을 보면 ‘화산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편견과 싸우며 끝없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개척했던 여성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하는 전시가 열렸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1897년 같은 장소에서 열린 유작전 이후 34년 만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1953년 ‘자화상’부터 작고하기까지 활동 시기별 작품과 자료 200여 점을 모았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전시장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최욱경, 앨리스의 고양이’ 전시장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화난 여인, 1966, 캔버스에 유채, 137×174㎝, 리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화난 여인, 1966, 캔버스에 유채, 137×174㎝, 리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보기 힘들던 최욱경의 대작을 한곳에 모아 개막 전부터 화제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대표작 ‘화난 여인’(1966)이 보인다. 1960~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작품이다. 하나의 색조로만 표현하는 ‘단색화’가 한국 화단을 장악한 시기였다. 화사하고 통통 튀고 자유분방한 최욱경의 그림들은 파격 그 자체였다.

‘줄타기’(1977)는 어떤가. 호방한 붓질과 화려하고 대담한 색, 불같은 격정이 느껴진다. 미술 애호가 호암 이병철 회장이 “그림 좋다”며 구입을 지시한 일화도 유명하다. 최욱경이 뉴멕시코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본 광활한 대지, 모래사막, 진귀한 야생동물이 공존하는 이국적 풍경과 초현실적인 꿈속 풍경이 뒤섞인 작품이다. 꽃과 산, 새 같은 형상이 춤추듯 뒤얽힌, 생명력 넘치는 그의 대표작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그보다는 덜 화려하나 색색의 꽃잎이 춤추는 듯한 ‘환희’(1977)도 관람객의 발길을 붙든다. 20세기를 풍미한 미 현대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의 공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그렸다는 ‘마사 그래함’(1976)은 거대한 연필화다. 춤추는 듯,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친 흰 형체가 숭고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신성수 고려산업 회장의 소장품이다.

1970년대 작업이 강렬한 원색 대비와 표현적 성격이 두드러진 대작 중심이었다면, 1980년대부터는 중간색을 주로 사용하고 조형적으로는 절제된 선과 구성을 강조했으며, 시처럼 압축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데 관심을 가졌다. 1979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한국의 산과 섬을 주제로 한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최욱경, 줄타기,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225×195㎝, 리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줄타기, 1977, 캔버스에 아크릴릭, 225×195㎝, 리움미술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마사 그래함, 1976, 종이에 연필, 102×255㎝,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 마사 그래함, 1976, 종이에 연필, 102×255㎝,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78년, 38세 때 최욱경의 화실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78년, 38세 때 최욱경의 화실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최욱경은 1940년 서울 출생이다. 출판사 ‘교학도서 주식회사’ 창립자 최상윤·조하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 때부터 당대 최고 화가인 운보 김기창·우향 박래현 부부의 화실에서 개인 지도를 받았다.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3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70년대에는 영남대와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을 무대로 활동했다. 

전시는 짧은 생애 동안 미술가, 교육자, 시인으로 활약하며 늘 새로운 세계를 탐색했던 최욱경의 진취적인 면모를 부각한다. 최욱경은 1980년대에 이미 상파울루, 뉴욕, 파리, 교토 등지의 한국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국제 전시에 다수 참여하며 당대 한국 미술 대표 작가로 인정받았다. 문학에도 애정이 컸다. 1965년 영문 시집 『작은 돌들(Small Stones)』을, 1972년 국문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을 펴냈다. 음악과 영화를 즐겼고 정치 토론과 요리를 좋아해 늘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전시장 한켠에 최욱경 화백이 생전 쓰던 화구, 문방사우, 즐겨 읽던 책이 모였다.  ⓒ이세아 기자
전시장 한켠에 최욱경 화백이 생전 쓰던 화구, 문방사우, 즐겨 읽던 책이 모였다. ⓒ이세아 기자

어디서나 ‘비주류’였던 최욱경이 느낀 불안과 혼란도 엿볼 수 있다. 그 시절 한국 언론과 평단은 최욱경을 “규수 화가”, “한국 최대의 그림을 그린 조그마한 아가씨”, “전혀 여성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그림을 그려내는 여류”로 불렀다. 미국 사회와 미술계에서도 ‘아시아 여성 작가’ 꼬리표가 붙었다.

최욱경의 자화상 작품, 시·에세이에서는 생전 그가 겪었던 정체성의 혼란이 드러난다. “마치 해답을 풀지 못한 수학문제처럼 나는 살아간다”거나, “누구입니까?/나는/(...)/조화할 줄 모르던/이상한 불협화음였었나요?/(...)/숙명 속에서는/벗어날 수 없는/슬픈 유성일런지도 모른답니다”(최욱경의 시 ‘자문자답’ 중)라는 고백이 그렇다.

그러나 최욱경은 꼬리표에 얽매이지 않는 용맹한 영혼이었다. 1960년대부터 미국을 휩쓴 ‘제2물결 페미니즘’을 현장에서 지켜본 그는 평소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다고 한다. 20대에는 ‘남자 작품 같다’는 평을 칭찬으로 여겼던 그는 40대에 접어들며 여성으로서의 경험과 생각을 표현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남성 위주의 관념을 어느 때인가 탈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여자들 자신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고, “이것은 ‘남성과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 자신이 갖고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힘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신의 가치를 되찾는 일,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데 수줍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오늘날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들에게 있어서 오히려 하나의 의무”라고 했다(1972년작 『낯설은 얼굴들처럼』에 실린 글 ‘여대생’ 중). “여권신장은 헌법을 고쳐야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해결점은 우리 여성 자신에게 있습니다”(1979년 2월 ‘여고시대’ 대담 중)라고도 했다.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45세에 세상을 떠난 화가를 기리며 다양한 추모 전시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장미꽃으로 뒤덮였던 애틋한 장례식과 추모 모임도 화제에 올랐다.

최욱경의 작품들은 지난해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 연 여성 추상화가 기획전에서도 비중 있게 소개됐다. 이번 전시는 눈이 즐거운 전시이다. 편견과 싸우며 거침없는 열정으로 스스로를 불살랐던 여성 천재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2월 13일까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예약(https://www.kguide.kr/mmca001/) 후 관람할 수 있다. 문의 02-2188-6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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