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조기주 화가(단국대 명예교수)
어머니 이경순 화가

이경순 조기주 모녀. 사진=본인 제공

192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난 나의 엄마 이경순(1928~ )은 당신 아버지의 사업으로 함경도 웅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해방 이후, 큰 언니 가족은 함경도에 남고 다른 가족들은 서울에 내려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엄마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서양화 전공 학생이 되었고, 이후에는 동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학 석사학위(1963)를 받았다.

때문인지 엄마의 기억은 온갖 미술과 관련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막 발발한 6월, 대학을 갓 졸업한 엄마는 명동에 화구를 사러 나섰다가 펑펑 터지는 대포 소리에 놀라 황급히 귀가하셨단다. 하지만 이미 한강 다리가 무너진 탓에 서울에 남았던 엄마와 가족들은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피난을 떠났다.

엄마의 기억은 피난 내려온 대구의 집, 그림을 그리려 개조해 사용했던 헛간의 풍경들로 이어진다. 전쟁 통에 세간살이 하나 넉넉히 챙기지 못한 피난생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화가의 꿈이 그 시절의 엄마를 버티게 한 것이다. 대구에서 창작활동에 매진하던 어느날, 엄마를 본 한 미국인 선교사는 그녀에게 미국으로 함께 건너가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이어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했다. 그 말에 놀란 외할아버지는 서둘러 딸을 결혼시켰다고 한다. 엄마는 당시 공군장교였던 나의 아버지 조필호를 만나 1952년 대구에서 화촉을 밝혔다.

1953년 서울이 수복되던 해 2월에 갓 태어난 나의 오빠를 데리고 가족은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엄마는 서울에 이사 온 이후, 같은 해에 열린 제 2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그림을 출품하여 당당히 입선을 차지했다. 그렇게 첫 작품을 출품한 2회 국전을 시작으로 거의 매해 엄마의 몸집만한 작품들을 그려내 국전에 출품했다. 내가 태어난 1955년과 동생이 태어난 1956년을 빼고는 거의 해마다 출품했으니, 그 열정과 노력이 새삼 대단히 여겨진다. 엄마와 엄마의 그림들, 국전. 어린 시절 국전을 감상하러 가곤 했던 경복궁, 청와대 앞길에 소복이 쌓인 노란 은행잎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막내 아들의 세 돐 즈음, 엄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1963년엔 석사학위를 받고 덕성여중 미술선생님으로 부임해 학교 근무와 어린 우리들 뒷바라지, 창작활동을 병행했다. 한 가지만으로도 벅찰 것 같은 일들의 연속에서도 엄마는 그 해 국전 특선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총 16회의 입선과 4번(63, 64, 74, 75)의 특선을 하며 추천작가에 오르셨다. 그리하여 여성 서양화가로는 유일하게 국전의 추천작가(1977)이자 초대작가(1982)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여성 작가의 삶이 오죽 힘들었을까. 그러나 엄마는 스스로 노력하며 화가로서의 삶을 당당히 이어갔다. 

이경순 화가
이경순 화가

여성으로 첫 국전 초대작가 돼

엄마는 전후 우리나라 구상화단의 1세대 여성 작가다. 광복 전후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구상화가이자 요절한 천재화가로 잘 알려진 이인성(李仁星, 1912-1950) 선생은 그런 엄마가 고등학생 시절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심하는 데 큰 힘을 실어 주신 은사다. 이인성선생으로부터 수채화를 배우고, 이화여대에서 다시 만나 유화를 배운 이경순 작가는 스승을 본 받아 당신만의 구상

화를 그려내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했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이화여대 김인승 교수와 심형구 교수께 가르침을 받았고, 석사과정에서는 김인승 교수께 지도를 받았다.

엄마의 작가로서의 창작열은 대단했다. 멈추지 않고 그리고 또 그렸다. 또래의 남성 작가들이 산이나 먼 교외로 스케치 여행을 다닐 때 엄마는 인물이나 정물을 많이 그렸다. 국전에 출품하기 위해 80호나 100호 크기의 인물화를 그렸고, 평상 시에는 꽃 같은 정물을 줄곧 그렸다. 낮엔 중학교 미술 선생으로, 밤엔 어린 세 자녀들을 돌보던 엄마. 엄마이자 직장인, 작가로 그것이 엄마의 최선이었다.

그런 노력 끝에 작가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화폭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냈다. 내가 주로 사용하던 마스킹테이프를 붙이고 떼어내며 아크릴물감을 활용해 만들어낸 새로운 화면은 평면화된 실내의 구조와 네모난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담고 있다. 입체감을 억누른 평면에서는 창 안의 실내와 창 밖의 풍경이 하나가 되어 독특한 세계를 구성했다. 이렇게 작품 전면에 등장한 평면성은 이후 엄마의 유화 작품에서도 배경의 문양으로 드러나며 그 작품 세계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마음 속에 이어갔던 그림에 대한 열정, 쉽게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늘 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열정이 안팎을 잇는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드러난 것일까. 나의 엄마이자 이경순 작가는 이렇게 어둡기만 했던 여성화가로서의 앞날을 스스로 밝히고 개척한 의지의 예술가다.

1965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주관 있는 미의식’을 보여줬다는 일간지(한국일보, 1965.6.14.)의 평을 받아내며 화가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굳혔던 엄마 이경순 작가. 이 전시를 시작으로 1982년엔 미국 뉴욕에서, 1986년과 1987년엔 일본 오사카와 도쿄, 교토 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당신이 ‘행복과 감사’라고 이야기하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올해까지 총 20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국전 추천작가 및 초대작가를 역임한 그녀는 녹미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사단법인 목우회의 고문과 미협, 녹미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95세에도 하루 3~4시간 작업

엄마와 내가 작가라는 길을 함께 걸은 지 어느덧 50년이 되어 간다. 2010년 두 번째 뇌종양 수술을 받은 후 이제는 떨어져 지내지만, 엄마는 그 전까지 30년이 넘도록 나와 함께 작업실을 사용한 참 스승이자 동료다. 그리고 이제는 9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하루 서너 시간을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열정의 예술가다.

내가 젊던 때엔 엄마의 정물화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한편으로 너무 고전적으로 여겨져 그 안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그런 엄마의 그림은 다른 그림이 가지지 못한 편안함, 진실함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특히 어느새 5회째를 맞이한 엄마와의 모녀전을 함께 하면서는 엄마와 작품들에서 참 많은 가르침을 얻게 됐다. 여성 예술가로서 버티고 헤쳐 왔을 험난한 길이, 그 속에서 오롯이 구축해 온 예술세계가, 여태 지치지 않은 열정이 작품마다 느껴지며 어느 거장의 작품들이 지닌 것과 같은 큰 울림을 전해 왔다. 사실은 고단했을 일생을 오히려 원동력 삼아 그려온 그림들이, 또 그림을 다시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온 인생이 새삼 위대하게 여겨졌다. 우리들을 품듯, 일평생을 아름다운 꽃과 정물을 포근하게 품어 그린 그림들이, 여전히 붓을 들어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한 길에 서 있다는 뿌듯함이 마음 속에 새겨지며 어느 때보다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런 나에게 엄마가 남겨준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 있다. 자라나는 내 모습을 남긴 7점의 유화 작품 ‘기주’들. 어린 시절 꼼짝 못하고 앉은 채로 견뎌야 했던 시간의 고통이 이제는 더 없이 소중한 선물이 된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엄마의 사랑과 가장 뜨거웠을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라니. 세상에 이런 선물이 또 있을까. 전시장에 걸린 그 그림들을 바라보며, 어렴풋이 당시의 엄마가 느꼈을 마음들을 조심스레 품어보며 엄마를 생각한다.

조기주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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