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내 정신 좀 보게나. 정기적으로 하는 일이라곤 글 쓰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매주 수요일마다 장자 교실에 다닌 지도 벌써 열 달이 지났는데 그걸 깜빡하다니. 얼마 안 된 줄 알았는데 그때가 5월이었으니까 두 달만 있으면 만 1년이나 되네. 와, 시간은 정말 자기 길을 잘도 간단 말이야. 장자 교실이 뭐하는 데냐고? 한글로만 글을 쓰다 보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밖에. 왜 있잖아, 공자 가라사대, 장자 가라사대 하는 그 장자(莊子)가 남겼다는 글을 배우는 곳이란 뜻이지. 그런데 뜬금없이 웬 장자냐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 있잖아. 그게 애들한테만 적용되는 게 아니더라고. 일생 동안 장자하고는 아무 관계 없이 살아갈 것 같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동양사상을 배우기로 했다고 하길래 나도 덩달이처럼 묻어간 거지. 아니, 강북에 사는 그 친구가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넘게 걸려 오는 강남의 교실이 우리 집에서는 걸어서 딱 십분 거리에 있다는 게 운명이라면 운명이었지. 만약 내가 별 할 일도 없는 처지에 인터넷 서핑이나 하면서 거길 안 나간다면 도통 친구에 대한 예의가 없는 인간이 될 것 같더라고.

그런데 그 친구가 장자 교실에 가게 된 계기도 뭐 그렇게 심오한 건 아니어서 나도 마음이 좀 가벼웠지. 장자 교실을 개설한 곳은 엉뚱하게도 여성부의 지원을 받는 강남여성인력기술센터라는 데야. 여성들의 취업을 도와 주는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곳인데 웬 장자? 그건 순전히 그곳 책임자(보통 관장이라고 부르더군)의 독특한 취향 덕분이었지. 내 친구는 또 그 관장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던 거야. 그 관장으로 말하면 나 역시 꽤 오랫동안 잘 알고 호감을 느끼던 여성이었고.

친구 따라 동양사상의 세계로

기술만 배우지 말고 교양도 좀 높이면서 살자는 야심적인 취지에서 관장은 어렵사리 재야 한학자를 모셔다가 동양사상 교실을 열었던 거야. 그리고 수강생을 모집했지만 요즘 누가 실용적이 아닌 것에 관심을 둬야 말이지. 결국 자기 주위에 관심 있을 것 같은 사람들 몇 명(그래도 처음엔 일곱 명쯤 확보했지)을 끌어왔는데 그 끈에 내 친구가 걸린 거고 나까지 덤으로 끼여든 거지.

나야 워낙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돌아가는 타입이라 공부한다는 생각보다 독특한 분위기에 끌렸다고 봐야지. 강사도 정말 요즘 보기 드문 남성(소상하게 설명하면 너무 길고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치는 게 좋을 것 같아.)인데다 수강생들도 다들 개성만점의 여성들이야. 물론 난 평소에도 이 세상에 평범한 인간은 없다고 주장하는 편인데 이번에 새삼 내가 옳다는 걸 확인했지.

심오한 원전 읽다 보면 시간이 잘 흐를까

그래 그 동안 뭘 좀 배웠냐고 묻지는 말아주길 바래. 난 그냥 날라리 학생이야. 겸손 떠는 말 아니야. 새까만 표지에 무거운 책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신통방통하게 여기는 수준이니까. 나이 들면 암기력은 줄어도 이해력은 는다는 말도 다 거짓말인가 봐.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도 한 3년 다니면 그래도 쌓이는 게 좀 있지 않을까 그것만 바라지.

여러 번 읽어도 어렵다는 동양의 원전을 읽으면서 노년을 보내면 시간이 잘 갈 거라고, 모두들 그렇게 야무진 꿈을 꿀 무렵 돌발사들이 터지는 걸 보면 세상이란 참. 지난 연말부터 내 친구가 갑자기 몸이 나빠져 못 나오더라고. 영 김이 샜지만 이번엔 덩달이를 그만뒀지. 그래도 '까만 건 글씨고 하얀 건 종이더라'라는 수준은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왕년의 범생이 기질이 되살아난 건지도 몰라.

이제 수강생은 관장까지 통틀어 다섯 명. 하지만 소수라도 교실을 계속 열자는 의욕만은 모두 강했지. 대한민국 여자들 정말 못 말리는 인간들이라니까. 그런데 지난 설 연휴, 대재앙이 발생한 거야. 그때 난 난생 처음으로 명절 때 외국여행을 떠났는데 짧은 기간 동안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지 뭐야. 우리의 그 멋진 관장이 졸지에 이 세상을 떠버렸다니까.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이지. 지금도 가슴이 아파.

그래도 장자 교실은 문을 닫지 않았어. 교실을 계속 여는 게 관장의 뜻일 것 같다는 그런 공감대 때문이지. 물론 언제까지 계속될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 하긴 예측 가능한 게 어디 있겠어? (광고: 혹시 함께 배워 보실 분 안 계세요? 초보자 대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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