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문화지원상 수상자 인터뷰](끝)
이경미 영화감독
2016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인상 수상

이경미 영화감독 ⓒ여성신문
이경미 영화감독 ⓒ여성신문

“참 이상하다.” 누군가에게는 불쾌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은, 이경미 감독에게는 찬사다. 그의 영화와 드라마 속에는 이상한 사람들이 등장해서 이상한 상황에 휘말리고 이상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상하게 끝난다. 그는 완전히 낯선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자신만의 문법으로 펼쳐내는 재주를 지녔다.

이경미 감독의 장편 데뷔작 ‘미쓰홍당무’(2008)에는 ‘삽질’을 일삼는 교사 양미숙이 등장한다. 보는 사람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민망한 일을 일삼는 주인공이지만, 어쩐지 밉지 않은 캐릭터다. 이 감독은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8년 만에 선보인 ‘비밀은 없다’(2016)는 딸의 실종을 다룬 스릴러. 장르적 공식을 파괴하고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화해 전혀 새로운 결말을 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2020)은 또 어떤가.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학교 곳곳, 호시탐탐 학생들을 위협하는 악귀가 등장하는데, 그 모습은 사랑스러운 모양의 달콤한 젤리다. 게다가 악귀를 쫓는 영웅은,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고 시니컬한 태도를 지닌 여성.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투덜거리며 학교 곳곳에 있는 젤리를 장난감 플라스틱 칼을 휘두르며 없앤다.

지금까지 이 감독의 영화와 드라마 속 주인공은 모두 여성이다. 전형성과 거리가 먼 여성들이다. ‘미쓰홍당무’의 양미숙은 자신이 짝사랑하는 남자의 딸과 끈끈한 연대를 맺고, ‘비밀은 없다’에서는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이 서사의 중심에서 극을 이끌어간다. ‘보건교사 안은영’도 마찬가지다.

이 감독은 독창적인 상상력, 디테일하고 탄탄한 시나리오, 독특한 작품 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비밀은 없다’로 파리한국영화제 관객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감독상,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대상, 올해의 여성 영화인상 각본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특히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돼 극을 이끌어갔다는 점에서 ‘비밀은 없다’는 “성평등 인식의 지평을 넓힌 대담한 성 정치학 텍스트”라는 평을 받았다.

2016년 양성평등문화상도 그가 다루는 여성 캐릭터에 주목했다. 심사위원단은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성 고정관념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고 남녀가 평등한 주체라는 인식을 확립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양성평등 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그는 “제게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자기 탐구와도 같은 과정이다. 그러다 보니 주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게 됐다”며, “이야기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에 대한 이해다. 저는 제 영화에서 모든 인물을 성별과 나이를 떠나 평등하게 대하려고 한다”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또 “앞으로도 많은 여성들이 서로를 보면서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양성평등문화상을 수상한지 6년이 됐네요. 당시 그 상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요.

“다양한 분야의 여성 전문가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된 일이 참 좋았습니다. 멋있는 사람들을 알게 돼서 뿌듯했습니다.”

- 지난 6년은 어떤 시간이었나요?

“그동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을 만들었고, JTBC 전체관람가 프로그램을 통해 단편영화 ‘아랫집’을 만들었습니다. 넷플릭스 단편 ‘페르소나’를 만들었고,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 책을 썼습니다.”

-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에서 처음으로 드라마를 선보였어요.

“50분 내외의 에피소드들을 한 호흡의 텐션으로 이어나가는 일이었어요. 드라마도 처음이고 판타지 장르도 처음이라서 새로웠어요. CG 작업이 많아서 어려웠지만 스태프들과 상상력을 나누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특히 남자와 앙상블을 이루는 이야기를 처음 해봤는데 즐거웠습니다. 남자 캐릭터를 상상하는 작업에 대해 조금 자신감이 생겼지요. 매번 새 작품을 만들 때마다 그 작품이 전환점이 됐습니다. 기억에 남는 반응은 “유니크하고 이상한데 좋다”, “미쳤다”, “괴상하고 특별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좋다”는 것이었죠.”

‘보건교사 안은영’은 플랫폼의 변화뿐 아니라 캐릭터의 관계 변화도 두드러진다. 처음으로 여-여 연대가 아닌, 여-남 연대를 보여줬다. 판타지적인 요소도 가미했다. 그는 “앞으로 부부 이야기를 담은 공포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어떻게 발견하시는지요.

“제가 보고 겪은 일들이나 제가 만난 사람들 등 저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제게 영감을 줍니다. 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은 모두 저의 이상형입니다. 제가 못 하는 말과 행동들을 그들은 거침없이 표현합니다. 어떤 형식이든 ‘사람’이 발견되는 이야기여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이 감독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외대 러시아어학과로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해운회사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졸업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이 2004년 미쟝센 단편영화제를 비롯한 각종 영화제에서 대대적인 호평을 받았다. 영화제 심사위원이었던 박찬욱 감독을 만나 그의 영화사에서 일을 했고, ‘친절한 금자씨’ 스크립터를 거쳤다.

- 이경미 감독의 영화에는 ‘학교’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감독의 학교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학교 때는 어떤 학생이었나요?

“굉장히 조용하고 소극적인 학생이었어요. ‘이렇게 살다가는 반장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반장이 되는 데에 실패했어요. 시험 기간엔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 도시락 먹고, 점심시간에 매점 가고 선생님이 하지 말라는 것들을 하기도 했지만 크게 일탈하지는 못하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학교는 제게 다양한 추억을 준 곳입니다. 즐겁고 좋은 기억이 많지만 10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저와 안 맞는 어른들의 말도 잘 들어야 했던 그 시절을 다시 살고 싶지 않거든요.”

-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부터, 왜 꾸게 되셨나요?

“우연히 영화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막연하게 꿈꿨지만 실현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어요. 그냥 영화 공부가 재미있어서 정말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

“돌아가신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께서 정말 엄격하셨어요. 아버지한테 잘난 척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이 감독의 아버지는 KBS 성우이며 연극 연출가였던 이완호 씨다. KBS ‘동물의 세계’ 내레이션을 23년간 맡았고, 외화 더빙 전담배우로 앤서니 홉킨스, 잭 니컬슨, 제프리 러시, 진 해크먼 등을 맡았다. 딸이 영화감독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본 뒤 2019년 9월 암으로 작고했다.

- 여전히 영화라는 매체는 여성보다는 남성에 기울어져 있나요?

“전체적으로 여성 스태프의 수가 많아져서 이제는 성별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기 어려워요. 하지만 전문 분야별로 성별이 몰려 있는 경향은 있어요. 재능 있는 여성 감독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고 응원해요. 다양한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면 좋겠어요.”

여성 감독 비율은 점차 늘어나지만 남녀 배우 성비의 불균형은 오히려 강화되는 추세다. 이 감독은 에세이 『잘 돼가? 무엇이든』에서 “여자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들은 투자가 안 됐다”며, “시나리오가 별로여서 그런지, 아니면 여자가 주인공이고 여자 감독이라 그런지. 통계로 짐작만 할 뿐”이라며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 영화감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해준다면?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느끼세요.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다면 좋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궁극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가장 하고 싶은가요?

“사람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 요즘 흥미를 당기는 이야기는 어떤 것들인가요?

“호러, 스릴러, SF를 좋아해요. 주인공이 사건을 만나 우리들이 상상해본 적도 없는 다른 세상과 만나는 이야기. 혹은 “내 주변 사람들이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다” 식의 이야기를 좋아해요. 다음 작품은 영화가 될 수도, 드라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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