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미성년 피해자 진술영상 증거 위헌”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 ‘2차 피해’ 우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28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정”이라며 헌법재판소 판결을 규탄했다. ⓒ여성신문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28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정”이라며 헌법재판소 판결을 규탄했다. ⓒ여성신문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 나오지 않고 대신 진술을 녹화한 영상을 증거로 인정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왔다. 반복된 피해 진술로 인한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법 조항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것이다.

당장 미성년자가 피해자인 성폭력 재판에는 진술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쓰지 못하게 됐다. 피해아동은 소송 과정에서 최소 1번 이상 법정에서 진술해야 하며, 피고인 측 변호사의 반대신문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어린 아동의 경우, 질문의 의미도 이해하기 어려워 피고인 측 유도신문 등에 의해 진술이 왜곡돼 결국 피해를 입증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018년 아동 성범죄자가 ‘헌법소원’

헌재는 23일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30조6항’에 대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며 재판관 6대 3의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성폭력처벌법 30조1항은 성폭력범죄 피해자가 19세 미만이거나 장애로 인해 사물 변별 능력이나 의사 결정 능력이 미약한 경우 그 진술을 촬영해 보존하도록 규정한다. 같은 법 제 30조 6항은 “1항에 따라 촬영한 영상물에 수록된 피해자의 진술은 공판기일에 피해자나 조사에 동석한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 또는 진술조력인의 진술에 의해 진정함이 인정되면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번 위헌 소송 청구인인 A씨는 위력으로 8세 아동을 수차례 추행했다는 등의 범죄 사실로 2018년 대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확정 받았다. 1심에서 피해 아동의 영상녹화 진술이 법정에 제출했으나 A씨는 이 증거에 동의하지 않았다. 1‧2심 재판부는 피해자 조사에 동석한 신뢰관계인들에 대한 증인신문 등을 거쳐 녹화된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다.

A씨는 증거능력의 특례를 규정한 성폭력처벌법 조항 등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신청했으나 법원이 기각하자, 2018년 12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는 12월 23일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30조6항’에 대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며 위헌 결정했다.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12월 23일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의 영상녹화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30조6항’에 대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며 위헌 결정했다. ⓒ헌법재판소

다수의견 6인 “피고인의 반대신문권 보장 안 해”

이번 헌재 판결의 핵심은 피해자 진술을 녹화영상의 형식으로 듣는 것은 법정에서 피고인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아동 성폭력 피해자가 법정에 직접 출석해서 진술하라는 취지다.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6인(유남석, 이석태, 김명수, 이종석, 김기영, 문형배)은 해당 조항에 대해 “미성년 피해자가 법정에서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영상물에 수록된 미성년 피해자 진술은 사건의 핵심 증거인 경우가 적지 않고, 이러한 진술증거에 대한 탄핵의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그럼에도 심판대상 조항은 진술증거의 왜곡이나 오류를 탄핵할 수 있는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다수 재판관들은 미성년 피해자 증인 신문에 따른 2차 피해 우려에 대해선 다양한 방법을 통해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수사 초기 증거보전절차를 적극적으로 실시해 공판 단계에서의 증인 소환을 최소화하고 △증인지원제도를 통해 비공개 심리를 하거나 비디오 중계를 통한 증인 신문 등의 방법을 제시했다. 

대법원 내부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은 한 손에는 법전을, 나머지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이 여신상은 모든 이들이 법 앞에 평등함을 상징하고 있지만, 남성중심적 법체계는 여성들에게 공평하지만은 않다. 가정폭력 피해자에 의한 가해자 사망 사건에서 사법부가 피해 여성의 관점에서 정당방위를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대법원 청사 내 정의의 여신상. 한 손에는 법전을, 또 다른 한 손에 공정성을 의미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여성신문

소수의견 3인 “법정 진술 땐 2차 피해 우려”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 3인(이선애, 이영진, 이미선)은 해당 조항이 “헌법이 정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재판관 3인은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를 복기하고 격렬한 탄핵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범죄행위만큼이나 피해자에게 강한 정신적 충격과 모멸감을 줄 수 있다”며 “반대신문이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 돼 피해자의 성품이나 평소 행동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경우에는 반대신문에 기대하는 기능과 달리 2차 피해만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또 “미성년 피해자의 경우 성년 피해자에 비해 법정 진술로 인한 2차 피해 우려가 큰 반면, 실체적 진실 발견에 대한 기여는 적을 수 있다”고 봤다. 유도신문과 암시적 질문에 의해 기억과 진술이 왜곡될 가능성이 성인보다 크고, 집요하고 날선 공격이 이어지면 실체적 진실 발견과 무관하게 미성년 피해자에게 심리적·정신적 충격을 줄 가능성이 크다고도 했다. 피고인이 친족 등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경우, 피고인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이나 주변인의 계속되는 회유와 압박 등으로 인해 법정에서 진술하는 미성년 피해자가 추가 피해를 입을 위험성도 크다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28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정”이라며 헌법재판소 판결을 규탄했다. ⓒ여성신문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28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정”이라며 헌법재판소 판결을 규탄했다. ⓒ여성신문

시민사회 “피해자의 용기로 이룬 역사, 퇴행시키는 결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28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2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정”이라며 “일반 시민의 상식에서도 크게 벗어난 중대한 오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규탄했다.

단체들은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이 사법절차 과정에서 2차 피해 대상이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정희진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팀장은 “이 소송 청구인은 2010~2011년 8세인 제자를 수차례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범죄를 부인하며 상고까지 했다가 기각되고 징역 6년형을 받은 성범죄자”라며 “헌재 판결로 인해 이 사건의 피해자처럼 8세인 아동도 가해자측 변호사의 반대신문을 겪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어 “어떤 양육자가 아동이 이런 것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선뜻 신고를 할 수 있을지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장 박수진 변호사는 “헌재의 이번 결정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미명하에 특별히 보호돼야 할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우려가 크다”며 “당장 오늘부터 아동 성폭력 피해자들은 법정에 나와 고통스러운 피해사실을 진술해야 한다. 과연 반대신문권 보장이라는 가치가 증언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아동들에게조차 법정에서 증언을 강요하면서까지 얻어내야 할 가치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헌재의 이번 위헌 결정은 성폭력 사건뿐 아니라 아동학대 사건에도 준용돼 혼란의 범위는 더욱 커질 것으로 우려도 나왔다. 헌재가 제시한 피고인 방어권과의 아동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방지를 동시에 조화롭게 해결하는 방안도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신수경 한국여성변호사회 변호사는 “증거보전제도는 피해자에 대한 피고인 측의 반대신문을 필수절차로 하고 있어 피해 아동은 더 복잡하고 겁나는 절차를 겪어야 하고, 화상을 통한 증인신문도 실무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상황인 점을 간과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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