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 난곡동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베이비박스는 버려지는 아기들의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의견과 아기를 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서울 관악구 난곡동에 설치된 ‘베이비박스’.   ⓒ여성신문

언어가 편견이 되고, 폭력이 될 때가 있다. 생각 없이 쓴 단어로 상대방에게 원치 않는 상처를 줄 수 있다. 조심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반복하게 되는 일상적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 속에는 차별과 편견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뉴스에서 ‘혼외자(婚外子)’라는 단어가 자주 들린다. 이 단어를 듣고 불편해진다. 이 단어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 싶을까? 이 단어는 법률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일 것이다. 이 말이 어찌 생활 언어가 되었을까 의문이 든다. 사실 이 단어를 쓴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단어는 아이를 향해 있다. 누군가를 향해 부르는 이 이름이 자신을 향해 있다면 어떨까? 임신과 출산은 축복이며 인류애이다. 결혼의 규약을 잘 지키는 것은 부부의 약속이다. 이는 태어난 아이를 향할 수는 없다. 알고 보면 이 아이는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켜진 소중한 생명이다. 존중받아 할 존재이다.

태어난 생명을 향해 거침없이 “혼외자”, “사생아”, “버림받은 아이”, “원치 않는 아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말은 아이를 향해 있다. 이 말이 자신에게 향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 말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이다. 나는 “정상”이고 너는 “비정상”이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름 붙여진 주홍글씨이다. 생명을 존중하고 태어나는 아이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붙이지 않아도 되는 이름이다. 아이는 소중한 존재 그 자체이다.

TV에서 베이비박스에 있던 아기를 입양했던 부모가 입양한 아이와 함께 베이비박스를 찾아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고 있는 목사가 아이에게 베이비박스를 보여 주면서 말했다. “너의 생명을 주신 엄마가 너를 지켜내기 위해 이 박스에 두었고 지금의 엄마가 너를 지켜내기 위해 입양했다”고 했다. 정답을 보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상담을 하다보면 자신이 뜻하지 않게 임신한 여성들을 만날 때가 있다. 임신 유지를 결정하는 경우는 아기를 지키겠다는 신념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여러 가지 난관 속에서도 아이를 지켜 내어 출산을 한다. 그 숭고한 신념과 정신은 사회적 편견 앞에서 차가운 시련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시련으로부터 아이를 지켜나간다. 누가 이들에게 자기들 식의 이름을 붙여 돌을 던지는 것인가? 이제부터 누구도 아이를 향해 이름 붙이지 말기를 부탁한다. 아이에게 붙여진 고운 이름 이외에 무엇으로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내가 익숙하게 쓰는 언어가 다른 의미로 전달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붙인 언어는 누군가를 규정하는 언어가 된다. 나도 모르게 편견을 드러내고, 차별을 전제하고 있으며 때로는 폭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의 ‘말’, 나의 ‘언어’부터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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