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혁의 북유럽 이야기] 제도의 나이, 민주주의의 수준
[최연혁의 북유럽 이야기] 제도의 나이, 민주주의의 수준
  •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학 정치학과 교수
  • 승인 2021.11.28 08:47
  • 수정 2021-11-28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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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  ©릭스방크(www.riksbank.se)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 ©릭스방크(www.riksbank.se)

스웨덴 학생들과 정치제도 수업시간에 게임으로 제시한 적이 있다. 현존하는 정치제도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정치제도는 무엇일까? 학생들은 정치사에 배운 지식을 동원해 다양한 답변들이 제시했다. 1828년에 설립된 미국 민주당을 꼽은 학생이 말이 끝나자마자 1688년 만들어진 영국의 토리정당이 있으니 더 오래된 제도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토리정당은 1834년 정식으로 보수당이라는 이름을 변경했으니 현존하는 제도로 민주당 보다는 젊다고 이야기 해 주니 머쓱한 표정이다.

그 정도에서 학생들이 더 이상 오래된 제도를 찾기가 힘들어 질 즈음 한 여학생이 자신 있게 스웨덴의 중앙은행인 릭스방크(Sveriges riksbank)라고 답변했다. 1668년 설립돼 국가의 화폐와 외환을 관리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도라고 확신하며 답했다. 중앙은행으로만 제한하면 스웨덴의 현 중앙은행인 릭스방켄이 가장 오래된 제도임에 틀림없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툼바시에는 릭스방켄이 지폐를 제조했던 공장이 남아 있다. 스웨덴이 처음에는 국채를 제작할 기술이 떨어져 그 당시 주식과 채권을 제작했던 네덜란드의 기술자를 스카웃해 국채를 만들던 곳이다. 지금도 그 당시 만들던 방식을 재연해 학생들에게 제작과정을 시연해 보이기도 한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 스웨덴 국립은행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치제도일까? 정답은 사실 영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현존하는 제도 중 아직도 상징적 의미와 함께 정치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영국의 상원이다. 하원과 함께 양원제도의 주춧돌을 놓았던 영국 상원은 14세기 에드워드 3세 때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귀족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왕에게 세금징수와 전쟁 등을 귀족과 상의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세워졌다. 하지만 지금의 상원(House of Lords)이라는 공식 명칭은 헨리8세 때인 1544년이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상원의 위상은 한 때 청교도 혁명 때 폐지된 적도 있었지만 다시 부활해 지금까지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하원에 정치적 위상과 역할은 많이 이양됐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 하원에서 결정한 법안 채택의 시기를 연장하는 등의 권한은 지니고 있어 종이호랑이만은 아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스웨덴에서 1539년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던 캄마르 콜레기엣(Kammarkollegiet)은 아직도 국가의 교회무덤관리, 종교단체의 등록과 관리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의 입찰과 조달업무, 국가공무원 보험지급 등도 담당하고 있다. 영국 상원이 정식명칭보다 사실 몇 년 더 앞서 설립된 국가조직인 셈이다.

한 번은 미국에 초빙연구원으로 여행하면서 공항에서 서류가방을 도난당한 적이 있다. 여권, 현금, 개인노트북 등 중요한 물품이 들어 있던 가방이었기 때문에 재정적 손실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스웨덴을 떠날 때 가정보험을 해지했기 때문에 여행보험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학과의 원로교수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니 캄마르 콜레기엣에 연락을 해 보라는 것이었다.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급한 김에 서류를 만들어 제출을 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스웨덴에서 날아온 편지 한 장은 시름에 빠져 있던 나에게 가뭄의 단비를 가져다 준 희소식이었다. 스웨덴이 얼마나 꼼꼼하게 국가공무원을 보호해 주는지 확인하게 해 준 순간이었다. 해외 체류를 위한 여행 중 당한 도난사고는 공무의 연장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보험으로도 보상을 받지 못할 경우 마지막 보호의 수단으로 보험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도난당한 총금액의 거의 3분의 2를 보상해 준다는 통보였다. 교수 초기의 박봉을 받던 시기였기에 얼마나 감동했던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도난사고를 당하고 주머니에 있던 현금을 털어 우동으로 한 끼를 때울 때 옆에서 각종 음식을 주문해서 먹던 옆 테이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1713년 설립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감찰청도 스웨덴 오랜 역사를 가진 국가기구 중 하나다. 감찰청은 검찰이 하지 못하는 고위정치지도자들을 수사하고 위법이 발견되면 검찰에 기소권까지 갖는다. 표현의 자유와 출판자유를 제한하는 행위에 대한 국민소원도 감찰청장의 소관이다. 총리는 의회의 불신임으로만 하야할 수 있으므로 정부각료들과 중앙 및 지방고급공무원들의 비리와 부패에 대한 수사를 지휘한다. 총리가 임명하지만 임기가 보장되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에 중립과 공정의 국민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우리나라 공수처도 스웨덴 감찰청장과 비슷한 역할을 부여 받고 있다. 하지만 스웨덴 감찰청장제도처럼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미 차기 대통령당선자의 의지에 좌우될 처지에 있다고들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실세권력보다 국민에 충성하는 것만이 제도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라는 지적을 귀담아 들었으면 한다.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정치학과 교수 ⓒ여성신문
최연혁 스웨덴 린네대 정치학과 교수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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