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을’ 콜센터 상담사]
고객 성적 욕설 참다못한 A씨
5개월 나홀로 소송 끝에 ‘벌금형’
“회사에 알렸지만 지원 못 받아”
가해 상황 지속돼도 3번 참아야

콜센터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바닥에 던진 헤드셋의 모습. 지난 10월 6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민주노총 콜센터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코로나19 시기 폭증하는 콜, 정부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으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신문·뉴시스
콜센터 노동자들이 바닥에 던진 헤드셋의 모습. 지난 10월 6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민주노총 콜센터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코로나19 시기 폭증하는 콜, 정부는 콜센터 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으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성신문·뉴시스

콜센터 상담사가 성적 욕설을 한 고객을 상대로 5개월간의 ‘나홀로’ 법적 싸움 끝에 처벌을 이끌어냈다. 회사가 고객을 상대로 고발을 한 적은 있으나 상담사 개인이 법적 조치를 통해 처벌을 이끌어낸 것은 이례적이다. 벌금 확정 사실을 확인한 상담사 A씨는 “홀로 고소를 진행하는 과정이 힘들고 지난했지만 결국 가해자가 잘못했다는 것을 확인받을 수 있어 기쁘고 홀가분하다”며 “개인이 아닌 회사가 상담사 보호를 위해 적극 대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고객이 욕설할 권리는 있고
상담사가 끊을 권리는 없다?

‘그 일’은 지난 5월12일 오후 8시경 일어났다. 한국도로공사서비스 콜센터 상담사 A씨는 한 남성 고객의 민원에 응답하던 중 난데없이 성적 욕설을 들어야했다.
“아줌마가 집에서 ***아, 뭣도 아닌 게 *이나 *아라.”
욕설을 퍼부은 남성 B씨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상담사 A씨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다. 고객 B씨가 욕설을 퍼부은 이유는 상담사가 원하는 대로 일처리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관리자에게 상황을 보고하자, “해당고객을 블랙리스트에 등록하도록 건의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는 A씨는 평소대로 일을 시작했다.
“2년째 상담사로 일하며 고객으로부터 수차례 욕설과 성희롱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A씨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홀로 소송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이튿날 변호사와 상담 후 해당 고객을 고소하기로 하고, 회사와 노조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부터 5개월간 지난한 법적 싸움이 시작됐다. ‘그 일’이 벌어지고 5개월이 지난 10월 14일, A씨는 가해자 B씨가 통신매체이용음란죄(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로 벌금 100만원이 확정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회사는 5일 뒤인 5월 18일 B씨를 ‘욕설주의 고객’으로 등록했다고 A씨에 알렸다. 회사는 악성고객 전화가 걸려오면 상담사의 컴퓨터에 ‘블랙리스트 고객’이라는 안내문구를 표출한다. 하지만 콜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는 상담사에게 무작위(랜덤)로 연결된다. 골라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B씨가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할 수도, A씨가 B씨 전화를 거부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상담사는 참기 힘든 욕설을 들어도 최소 3번은 참아야 했다. 그게 콜센터의 ‘절차’다. 고객응대메뉴얼에 따라 고객이 성희롱·욕설 등을 했을 때 상담사가 바로 전화를 끊지 못한다. 자제해줄 것을 요청하는 멘트를 2회 해야 한다. 2단계에 상담이 종료될 수 있다고 안내를 한 뒤 3번째 폭언이 이어진 뒤에야 통화를 끝낼 수 있다.  

A씨가 고객 B씨를 고소한 지 6개월 만인 지난 11월 8일, 회사 측은 민원 유형을 세분화한 콜센터 민원 관리 응대 매뉴얼을 직원들에게 공지했다. 개정되는 메뉴얼은 악성 민원인에 대한 고소고발 진행 시 행정적 조치에 대해서는 회사가 적극 지원하며, 해당 직원에 대한 보호를 최우선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민원 유형별 대응 방법도 개정하기로 했다. 원청인 한국도로공사와 협의해 최종 메뉴얼을 공유한다는 계획이다. 

A씨는 “이제라도 회사가 재발 방지를 위해 메뉴얼을 개정하고 적극 대처하겠다고 나서 다행이다”라며  “더 이상 콜센터 상담사들이 욕설과 성희롱에 힘들어하지 않도록 방지 시스템과 지원 체계가 구축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는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을 만들어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등의 상황에 처했을 때 노동자는 즉시 응대를 중지하고, 관리자에게 알려 관리자가 가해자를 응대하도록 제시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는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을 만들어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등의 상황에 처했을 때 노동자는 즉시 응대를 중지하고, 관리자에게 알려 관리자가 가해자를 응대하도록 제시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

즉시 응대 중지·회사가 고발 등
보호 가이드라인 적극 마련해야

2018년 시행된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주는 고객의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등으로부터 감정노동자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문제상황 발생 시 대처 방법 등을 담은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A씨는 “법 시행 이전과 이후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법이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장에 안착하지 못한 탓이다. 대부분의 콜센터 업체는 QA(Quality Assurance·품질보증) 평가제로 콜센터 상담사의 업무를 평가한다. 고객에게 얼마나 호응했는지 등에 따라 점수를 매겨 상담사를 통제한다. 결국 이 평가제가 고객의 막말을 들어도 즉시 전화를 끊지 못하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전국네트워크’(이하 네트워크)가 지난 2월 공공기관과 민간 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객응대업무 매뉴얼을 분석한 결과, 감정노동자 상당수가 고객으로부터 폭언 등의 피해를 입은 즉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3~7단계에 걸쳐 폭언 자제 안내 절차를 거쳐야만 고객 응대를 종료할 수 있었다.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한인힘 일과 건강 사무처장은 회사가 콜센터 상담사에게 고객의 가해로부터 ‘피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사무처장은 “상담사가 전화 응대를 할 때 고객으로부터 욕설이나 성희롱 발언을 들으면 여러 번의 욕설을 듣고 안내 절차를 밟은 뒤에야 전화를 끊을 수 있다”며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노동자가 법적인 절차를 밟기를 원한다면 회사가 지원해주고, 피해 노동자가 트라우마를 갖지 않도록 심리적 지원도 해주는 등 적극적인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고객이 합리적인 민원을 제기할 때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인력을 늘리고, 처우를 개선하는 등 환경을 구축하는 것도 고객의 민원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CS(고객만족) 교육’은 친절한 말투에 대한 교육이 아닌 질 높은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직무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감정노동자 보호 매뉴얼’을 만들어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등의 상황에 처했을 때 노동자는 즉시 응대를 중지하고, 관리자에게 알려 관리자가 가해자를 응대하도록 제시했다. 전화 응대의 경우 가해자에게 ‘폭언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응대하지 않는다’는 안내멘트를 보내고, 가해자 번호는 3개월 유입차단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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