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보통날] “잘하셨어요” 나를 일으켜 세운 한 마디
[김지은의 보통날] “잘하셨어요” 나를 일으켜 세운 한 마디
  • 김지은 작가(『김지은입니다』 저자)
  • 승인 2021.10.29 13:35
  • 수정 2021-10-29 13: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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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20년 만에 성매매 업소를 벗어나 반성매매 활동가이자 작가가 됐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반비)를 통해 성매매 경험을 용감하게 증언하고 성 산업의 여성 착취 구조를 폭로했다. 그는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 세상을 쩌렁쩌렁 울리기를 바란다. ⓒShutterstock
“잘하셨어요.” 내게도 그 말이 오래도록 사무쳤다. 인간답게, 안전하게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미투를 했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 간 곳, 처음 보는 사람들 곁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때 이미경 소장의 그 말은 다시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Shutterstock

일본의 미투 운동을 이끌고 있는 이토 시오리씨를 만났다. 줌(Zoom‧화상회의 플랫폼)을 통해 만난 그녀는 카메라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고, 나는 카메라를 끈 채 그녀와 함께 했다. 그 동안의 긴 싸움에 지칠 만도 한데 그녀에게서는 가을 햇살 같은 밝고 따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함께 목소리를 내는 모임 활동을 통해 싸움과 치유의 여정을 굳건히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던 그 때
이미경 소장에게 들은 한 마디

이토 시오리씨는 2018년 방한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미투를 보았고, 거리에 나온 분노와 함성, 연대와 지지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당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건넨 말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당신이 하신 행동은 최선이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2018년 3월 5일 밤, 미투를 하고 갈 곳이 없어 당시 김혜정 활동가의 집에 숨죽여 있던 날, 나 역시 이미경 소장에게 같은 말을 들었다. “잘하셨어요.” 내게도 그 말이 오래도록 사무쳤다. 인간답게, 안전하게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미투를 했지만, 내가 돌아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 간 곳, 처음 보는 사람들 곁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때 이미경 소장의 그 말은 다시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시오리씨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위기감으로 언론에 고발하고, 거대 권력과 싸운 김지은씨의 상황이 자신과 너무 비슷해서 놀랍다고 말했다. 오늘 만남을 통해 서로 연대하는 시간이 되었고, 미투는 언론과 함께 가야한다는 조언도 해주었다. 끊임없이 말하고, 기록해야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외롭게 싸우지만 서로의 용기에 힘을 얻고 교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랬다더라’ 일방 주장 실은 언론에
대중 시선도 동정에서 비판으로

줌에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어느 한 빙상인을 향한 성범죄로 감옥에 가 있는 사람은 재판 기록을 이용해 피해자를 비난했고, 언론은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썼다. 어느 누구도 그 자료가 어디에서, 왜 나온 것인지 묻지 않았다. 재판 기록이 유출되어 피해자를 비난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랬다더라’라는 일방적 주장을 실으며 피해자 죽이기에 동참했다. 금세 본말은 전도되었고, 대중의 시선은 피해자를 향한 동정에서 비판으로 바뀌어 갔다.

이런 일을 공개적으로 보며 ‘다른 사건의 피해자가 또 다시 고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는 이미 고발만으로도 자신의 인생이 해체되고, 힘들어질 것을 알면서도 피해 사실을 알린다. 그럼에도 전혀 다른 이유로 가해자의 공격을 받는다면 어느 누가 고발할 수 있을까? 안전을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 잘했다는 말을 듣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 권력과 지위를 가진 자들을 향해 미투 할 수 있을까?

2차 가해자에게 바란 건 공개 사과
그 마음마저 비웃은 꼼수 사과

고발 이후 욕설 댓글과 인터뷰로 나를 향한 2차 가해를 집중적으로 했던 안희정 측근에게 최근 법원의 조치가 내려졌다. 내가 원한 건 공개적인 사과였다. 주변에서는 그동안 그런 사례가 거의 없다고 말렸지만, 가해자의 공개적인 사과와 반성을 요청했다. 그 행위가 있어야만 피해자와 2차 가해자 모두에게 지난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더불어 이 과정이 하나의 선례로 남기를 바랐다. 강제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은 ‘공개 사과문’ 조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해자는 사과문 게재일을 어기고 뒤늦게 사과문을 올렸고, 보란 듯이 주변인들에게 기존 SNS 계정을 폭파했다고 말하며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 온라인 활동을 이어갔다. 긴 링크 주소를 누르고 들어가야 사과문을 볼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 사과문조차 쉽게 볼 수 없었다. 공개적인 사과는 오간 데 없고, 법망을 비웃는 꼼수만이 남았다. 진심어린 공개 사과를 원했던 나는 또 다시 고발해야하는 상황으로 돌아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도돌이표 속에 사는 것 같다.

미투 이후 네 번째 가을을 마주한다. 찬바람에 손끝이 시리다. 자연은 순리대로 추위와 더위를 반복하는데, 나의 일상은 한 계절에 멈춰있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사건, 끝난 일이지만 피해자에게는 현재 진행형의 일들이다. 지난하고, 힘겨운 일상에서도 가느다란 끈을 놓을 수 없는 건 다시는 나 같은 고통을 겪을 피해자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 끝까지 싸우고, 말하고, 기록해야 범죄 피해를 받은 누군가의 인생에는 도돌이표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범죄의 피해가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당신의 고발이 잘한 행위임을 말해주고 싶다. 내게도 이토 시오리의 가을 같은 따뜻함과 이미경 소장의 울림 있는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는 계절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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