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당신의 집은 안전한家]
올해 1월~9월 서울 지역 법원 5곳
주거침입 성범죄 판결문 16건 분석
안전해야 할 집이 범죄현장으로

“집은 여자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1년 동안 살해당한 여성 중 58%가 친밀한 파트너 혹은 가족에게 당했다는 조사 결과 발표하며 이렇게 일갈했다. ‘집’은 가장 안전해야 하는 공간이지만, 주거침입과 가정폭력 범죄의 현장이 되고 있다. 강력범죄로 이어질 수 있지만, 여전히 처벌은 가볍다. ‘집’을 둘러싼 범죄에 대한 인식과 양형은 한국사회가 여성 대상 폭력을 바라보는 바로미터다. <편집자 주>

여성 1인 가구가 급격히 늘면서 주거 안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신림동 사건’은 여성 1인 가구의 주거 안전이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2019년 5월 오전 6시쯤 서울 신림동에서 발생했다. 새벽녘 귀가하는 여성을 뒤쫓던 남성이 여성이 집으로 들어가는 찰나 강제로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침입하려 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이 공개되자 공분이 일었다. 혼자 사는 여성이라면 한 번쯤 느껴 봤을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 사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 가해자는 주거침입, 강간미수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주거침입 혐의만 인정돼 징역 1년을 확정 받았다.

‘신림동 사건’은 반복되고 있다. 여성신문 취재팀은 주거침입 성범죄 혐의로 올해 1심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을 통해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도 여성들이 얼마나 안전을 위협받고 있는지 살펴봤다. 올해 1월부터 9월 15일까지 서울 지역 법원 5곳에서 ‘주거침입’과 ‘성범죄’라는 표현이 들어간 판결문을 찾았다. 1심 선고 나온 54건 중 유죄 판결을 받은 주거침입 성범죄 사건 16건을 분석했다.

한 여성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어떤 남자가 자신의 방을 들여보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올린 사진. 이후 SNS상에선 혼자 사는 여성들의 스토킹과 주거침입 등 각종 피해 유형을 공유하는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 해시태그 운동이 진행됐다.
한 여성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어떤 남자가 자신의 방을 들여보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올린 사진. 이후 SNS상에선 혼자 사는 여성들의 스토킹과 주거침입 등 각종 피해 유형을 공유하는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 해시태그 운동이 진행됐다.

피해자 ‘사냥’하는 주거침입 가해자

가장 안전해야 할 자신의 집에서 낯선 사람에 의해 성범죄 피해를 입은 사람, 그 가운데 가해자에게 응당한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성공한 사건은 16건이었다. 사건 경위를 살펴보면, 공통점이 보인다. 가해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16건 가운데 14건(87.5%)의 가해자는 피해자와 일면식이 없는 낯선 남자였다. 동호회에서 알고 지내던 남성, 첫 출근한 직장의 사장도 주거침입 가해자로 돌변했다.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20~30대였다. 단 한 건을 제외한 15건(93%)은 ‘밤늦게’ 또는 ‘새벽’에 벌어졌다.

피해자는 귀가하는 길 또는 집안에서 가해자들의 ‘사냥감’이 됐다. 늦은 밤 홀로 귀가하는 여성을 타겟으로 정한 사례는 5건(31%)이었다. 한 남성은 배달대행업체에서 일하며 10대 여성이 다세대주택 지하 1층에 혼자 사는 것을 알게 된 뒤 다시 강제추행을 하고 성폭행을 시도한 사례도 있었다.

판결문에서 거주 형태가 확인된 사건을 들여다보면 피해자 상당수는 다세대주택에 살았다. 허술한 방범 장치를 노린 범죄도 확인됐다. 한 가해자는 복도 측 방충망만 닫은 창문으로 집안에 침입했고, 또 다른 가해자는 잠겨 있지 않은 출입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피해자가 공동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길 기다렸다가 잽싸게 따라 들어간 경우도 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성폭행하기로 마음먹고’ 피해자의 뒤를 좇는 경우도 여럿이었다.

초범‧합의 이유로 집행유예도

성범죄 전과가 있는 가해자는 3명이었다. 양형 사유에 관련 전과가 없는 ‘초범’이라는 것이 언급된 가해자는 8명(50%)이었다. 피해자와 합의한 사건은 4건이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힌 사건은 3건이었다. 집에 무단 침입하고 강제추행‧성폭행을 했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난 가해자도 2건 있었다. 재판부는 형사처벌 전력이 없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합의를 했다는 이유를 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주거침입 성범죄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보복이 무서워서, 또는 끈질긴 합의 요구에 지쳐 합의해주거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에 서명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 합의와 처벌불원은 가벼운 처벌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전체 판례 중 1건은 강간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고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피해자가 처벌불원을 했다는 점이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됐다. “불법촬영 범행 도중 촬영을 중지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방충망을 교체해줬다”는 것도 양형 이유에 포함됐다.

온라인에 확산된 ‘신림동 강간범 영상공개합니다’라는 제목의 1분30초짜리 동영상 화면.
지난 2019년 5월 발생한 ‘신림동 주거침입’ 사건 CCTV 영상 캡처.

형법상 주거침입죄의 최대 형량은 징역 3년이다. ‘신림동 사건’ 발생 전까지 실형이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성범죄 특례법(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에서 ‘주거침입’를 한 뒤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특히 엄중하게 처벌한다. 계획적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에게 끼칠 수 있는 피해 정도가 극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거침입 성범죄에서 가해자는 피해자를 특정해 미행하고, 허술한 방범장치를 악용해 주거지 내에서 피해자를 완전히 고립된 상황으로 유도해 범행을 저지른다. 주거침입 범죄를 단순히 우발적 범행으로 볼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가장 안전해야 할 자신만의 공간에서 폭력을 당했다는 불안과 두려움은 후유증으로 남았다. 피해자들의 후유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사생활을 평온하게 보장받아야 할 자신의 주거지에서 성적 자유를 침해당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등 정신적 충격을 호소한다는 내용이 판결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면서 최근 주거침입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도 처음 마련됐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3월 주거침입범죄 양형기준안을 의결했다. 양형위는 주거침입의 기본 형량을 6개월에서 1년으로 하되 가중인자가 있을 경우 2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성적 목적으로 주거침입을 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스토킹, 보복 등 비난할 만한 범행 동기를 가중사유로 정했다. 새 양형기준은 지난 7월부터 시행 중이다.

최근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로 관련 지원책이 쏟아지고 있다. ‘신림동 사건’ 이후 여성 1인 가구주의 주거 안전을 위한 방안도 나오고 있으나 무엇보다 가해자가 주거침입 범죄 행위를 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중요하다.

주거침입강간죄 또는 주거침입강제추행죄 등과 같이 두 가지의 범죄가 결합돼 있는 경우에는 통상적인 주거침입죄만 인정되거나 주거침입죄와 강제추행죄가 별개로 인정되는 경우보다는 전반적으로 더 높은 형량이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강제추행 이후 며칠 뒤 동일한 피해여성의 주거에 침입해 주거침입죄를 범한 경우 판결이 달라졌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공포를 겪고 있음에도 집행유예가 선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주거침입죄만 범한 경우와 주거침입 후 강간 또는 강제추행 등 성폭력행위로 나아간 경우를 동일선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수 있다. 형사적 책임은 행위자의 내심에 담겨 있는 잠재적 의사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표출된 외적 행위에 대해서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찬성 변호사는 "강간행위 또는 추행행위의 실행에 착수한 직접적인 행위까지 인정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를테면 여성 혼자 거주하는 주거에 침입해 음란한 말이나 행위를 함으로써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점이 인정될 수 있다면, 주거침입 행위가 얼마든지 더욱 중대하고 심각한 성폭력범죄로도 곧바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바로 전 단계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적용할 수 있는 법조항은 비록 성폭력범죄 아닌 주거침입죄뿐이라고 하더라도 양형에서는 가중요소로서 적극 고려해야 할 필요가 크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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