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 이야기]
방송인 유인경씨
어머니 신지선씨

손자들도 잘 봐주셨던 엄마와  동네 식당에서 외식한 후 모습. ⓒ유인경
손자들도 잘 봐주셨던 엄마와 동네 식당에서 외식한 후 모습. ⓒ유인경

 

지난해 잡지사 편집장 출신인 후배 박지선을 만났을 때 책을 쓸 예정이라고 했다. “가제는 <딸이 엄마에게 묻다>에요. 엄마도 고령이시니 요양원이나 장례절차 등을 미리 상의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엄마를 인터뷰해보려고요. 생각해보니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나는 박지선이 너무 부러웠다. 질문을 던지고 답해 주실 엄마가 살아계시니 말이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난 왜 기자생활을 일제강점기만큼 했고 인터뷰 전문기자로 알려졌으면서도 정작 엄마를 인터뷰할 생각을 못했을까. 난 엄마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수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 음식조차 확실히 모르고 취향이나 엄마의 소녀시절에 대해서도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저 내 요구사항만 늘어 놓았다.

엄마는 내가 급할 때마다 달려온 119 구급대였고, 필요한 돈은 다 주시던 ATM기였으며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주신 탁월한 상담가이자 해결사였다. 요즘 인기영화인 어벤져스의 모든 영웅들을 합친 힘을 내게 보여주셨다. 그게 당연한 걸로 알았다.

그런데 딸을 낳아 기르고 이제 외손자도 태어나 할머니가 되고 보니 얼마나 엄마가 비현실적인(?) 능력의 소유자였는지 경이롭기만 하다. 무책임한 성격의 남편, 공부는 잘해서 자랑스러웠지만 괴팍한 성격의 네 아들, 그리고 마냥 의존적인 두 딸을 키우면서 경제적 지원은 물론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들을 담담히 해결해 주셨을까.

물론 엄마는 그렇게 평생 인내와 헌신으로 살며 모래시계처럼 모래알 한 알까지 소진하시다 치매에 걸려 10년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엄마의 삶이 애닳고 한스러워서가 아니라 엄마를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죄책감에 ‘엄마’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첫 유럽 여행에서  찍은 엄마의 기념사진. ⓒ유인경
첫 유럽 여행에서 찍은 엄마의 기념사진. ⓒ유인경

엄마에게 감사드리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지만 첫번째는 ‘덕담’이다. 엄마는 항상 “넌 잘 될거야” “아유, 잘 했다” 등 덕담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다소 무뚝뚝한 성격이셨는데 막내딸에게만은 미소와 감탄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실패와 실수에도 “다음에 잘 하면 된다”라고 하셨고 남편의 부도 등 사건이 터졌을 때도 “사람이 잘 살고 못살았고는 그 사람 무덤에서 가려지는 거야. 장마도 한 달 이상 가지 않아. 좀 기다려보면 좋은 일 있을 거야”라고 위로해주셨다. 막막한 상황에서도 “엄마가 난 운이 좋다고 했으니 곧 잘 해결되겠지”란 희망을 가졌다. 그저 엄마의 ‘말씀’뿐이었는데도 지금도 부적같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내 사주에 말년이 좋다고 한 엄마의 말씀을 뼛속 깊이 새긴 덕분이다.

다음은 ‘기회’를 주신 것이다.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풍족한 살림이 아니었음에도 뭐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큰오빠가 살던 독일을 비롯, 유럽 여행을 한달 간 다녀오신 엄마는 “꼭 유럽에 가봐라. 책이나 영화로 배울 수 없는 것을 느낀다”고 하셨다. 1983년, 당시 근무하던 잡지사에서 해외취재를 허락해줘서 45일간 유럽에 갈 기회가 생겼다. 엄마는 500만원을 여행비로 주셨다. 해외여행 자율화도 되기 전인데 여기저기 가보고 먹고 사고 싶은 것 다 하라고 하셨다. 당신의 감동을 딸에게도 전하고 싶어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큰 돈을 주신 게다. 난 엄마의 당부(?)에 충실하게 정말 풍요로운 여행을 즐겼다. 그 때의 추억과 감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자산을 남겼다. 그런 영향으로 내 딸을 프랑스 파리에 유학 보냈다. 

60대의 어머니 얼굴. 내눈에는 최고의 미인이셨다. ⓒ유인경
60대의 어머니 얼굴. 내눈에는 최고의 미인이셨다. ⓒ유인경

 

무엇보다 ‘추억’을 선물로 주신 엄마에게 감사한다. 엄마는 요리솜씨가 좋아 김치는 물론 각종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제삿상에 올리던 탕국을 비롯, 늦가을에 채소에 찹쌀풀을 묻혀 말렸다 겨울이면 튀겨 먹던 각종 부각 등 음식의 추억은 지금도 내 몸이 반응한다. 바느질과 손뜨개로 옷도 만들어 입히셨다. 또 동네 마실이건 계모임이건 막내인 어린 나를 별책부록처럼 데리고 다니셨다. 부유한 집에 초대받아 가셨을 때 찻잔이며 우아한 가구를 보여주면서 “너도 이담에 이런 집에 살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책도 많이 읽으시고 음악도 좋아하셨다. 배호의 <누가 울어> 등 가요는 물론 칸초네를 좋아하셔서 이탈리아 영화 주제곡 ‘Sinno me moro’나 산레모가요제 수상곡 등을 즐겨 들으셨다. 10년전 산레모에 갔을 때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났다. 

덕분에 엄마가 10년 동안 치매를 앓아 점점 지우개로 지우듯 기억을 잃어 갔을 때도 엄마에게 해드릴 말이 너무너무 많았다. “엄마, 기억나? 그때 엄마가 나 KBS합창단에 합격했다고 명동에 있는 ‘예쁘다양장점’에서 보라색 원피스 맞춰준 것 말야. 엄마는 동네에서 사 입고 나는 비싼 옷 맞춰줬지” “얼마 전에 무교동에 갔더니 엄마가 자주 사주던 소금구이 식당 건물이 없어졌어. 정말 고기랑 파무침이 예술이었는데” 등등 세헤라자데처럼 이야기를 해드렸다.

18년 전에 엄마는 세상을 떠나셨다. 엄마는 지구에서 사라지셨지만 저 하늘나라에서 나를 돕는 수호천사 역할을 하신다고 믿는다. 힘든 일이 있으면 하늘을 향해 “엄마 도와줘”라고 말한다. 신기하게도 힘든 일은 풀리거나 잊혀진다. 그게 여전히 유효한 엄마의 마법이라고 믿는다.

<유인경>
1982년 잡지사 기자. 1990년 2월~2015년 11월 경향신문 기자. 정년퇴직 후 강의, 방송 출연, 책쓰기, <유인경TV> 운영. <내일도 출근하는 딸에게>는 10만부 이상 판매, 일본과 대만 등에 수출. 손자가 태어나 할머니의 세계를 상품화(?)할 궁리를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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