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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언니 별명은 납작코였다. 다들 코가 오뚝하게 높지는 않지만 보통은 되는 식구들 사이에서 언니의 코는 유난히 낮았다. 거기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경제적인 이유는 아니었음이 분명한데-고등학교에 진학을 시키지 않아, 언니는 원하는 만큼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 사촌을 포함해서 동생들이 학교에 다니고 진학을 할 때, 언니는 공장에도 다니고 집안 살림도 돕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언니는 착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2년 터울로 아들 둘을 낳아 이제 제대로 재미있게 사나 싶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형부는 만성 간염으로 병치레를 하느라 일을 할 수 없었고, 그러니 언니가 재봉틀 일에서부터 식당 서빙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살림을 꾸려나가고 아이들 공부를 시켜야 했다. 먹고사느라 바쁜데다가 밤에도 일을 하니 보통 때는 물론이고 명절 때에도 만날 수 없었다. 99년 가을인가 친척집 잔치에서 언니를 잠깐 본 것이 그나마 가장 최근에 만난 기억이다.

언니가 새벽에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다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 일요일 아침이었다. 언니는 심한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고,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기계의 도움을 받아 숨을 이어가고 있는 언니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건강할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한 통, 얼굴 한번 보지 못하더니, 이렇게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 돼 누워 있으니 만나는구나 싶어 눈물이 쏟아졌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이제 비로소 어린 시절 언니 생각이 난다. 어른들이 대놓고 놀려대는 납작코 소리가 얼마나 싫었을까, 동생들 학교 다닐 때 자기만 같이 다니지 못했으니 그건 또 얼마나 아팠을까. 이미 돌아가셨지만 살갑게 품어주지 않은 부모 원망도 많이 했겠고, 아픈 남편에게 화도 많이 냈으리라. 그래도 이제 둘 다 대학생이 됐고, 큰아들은 군대 제대를 앞두고 있고 작은아들은 입대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 든든함은 또 얼마나 컸을까. 아픈 엄마 생각에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조카를 바라보니, 비 맞아 날갯죽지 젖은 어린 참새들 같다. 평소에 스물 넘으면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두 아이는 결코 어른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서 있다면 마흔 중반의 나도 그 아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계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목숨을 지탱할 수 없고, 그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불확실함 속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 준비'를 생각해 본다. 혹시 '리빙 윌(Living Will)'이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리빙 윌'이란 '생전 유서' 혹은 '존엄한 죽음을 위한 선언서'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죽을 권리를,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선언하고 서명해 두는 것'을 말한다. 혹시라도 병에 걸려 치료가 불가능하고 죽음이 임박할 경우에 대비해, 생명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연명치료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고, 아울러 이에 따르는 모든 행위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는 선언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다. 의식이 없는 환자의 연명치료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며 고통스러워하는지 모른다. 또한 그 결정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기에 참으로 혼란스럽다. 죽음 준비는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당사자인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며, 죽음 뒤에 남게 되는 가족들의 혼란을 막아주는 더할 수 없는 선물이다. 잘 죽을 수 있으려면 잘살아야 하는데, '죽음 준비' 없이 잘사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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