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에 등장한 누드 모델

변신원/ 문학평론가

위대한 화가로 여성을 떠올리기는 어려우나 화폭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여성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완전히 벗은 풍만한 육체까지도! 왜 여성들은 예술의 이름으로 헐벗은 채 구경거리가 되어야 하는 걸까.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상업적 누드 화보집을 예술로 둔갑시키는데도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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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의 모델 조봉희

<조선일보>1925.2.22

근대화와 더불어 우리의 미술계도 여성의 누드가 공개적인 감상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당대의 사회문화적 변화의 복합적 결과다. 우선 공교육을 받은 전문적 화가의 등장으로 예술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변화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림은 중인들의 생계수단이거나 문인들의 여기(餘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화 이후 조선 상류층 자제들이 미술공부를 위해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미술은 과거와 다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개성의 드러남을 중시하는 회화, 공교육을 받고 공식적인 활동을 하는 화가라는 존재는 과거의 환쟁이와는 격이 다른 것이다. 게다가 성에 개방적인 일본 문화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면서 육체에 대한 논의가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분위기의 변화와 더불어 여성의 누드는 한 차원 높은 예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나체 모델도 등장하게 되었는데 1922년 조선일보에 실린 김복진의 나체모델 기사는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조선 소녀의 좌상을 제작중인데 모델로는 시내 와룡동 88번지에 있는 조봉희(14)라는 귀여운 소녀를 사용중(…중략…) 김씨는 손에 흙을 든 채로 기자를 보며 '아틀리에(제작실)도 없이 제작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억지의 일이올시다.(…중략…)조각 예술은 그림과도 달라서 조선에는 이해자가 너무나 적습니다.”

신문에 실린 모델의 자연스러운 포즈는 우리가 알고 있는 1920년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 모델들이 후일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다만 이태준이 1934년에 발표한 <법은 그렇지만>이라는 소설에서는 허영에 들뜬 여자가 화가의 꾐에 빠져 누드 모델을 하다가 정조를 잃고 여러 남자를 방황하다가 살인자가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허구에 불과하지만 현실이 이보다 낳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와 더불어 절망적인 사실 또 하나….

“일본여자는 꿇어앉아 버릇하고 또 발을 벗고 다니는 관계로 상반신은 정말 좋으나 하반신은 허리가 굵고 다리가 모질어서 재미가 없고, 그렇다고 조선 여자는 또 젖이 너무 처지고 영양이 부족하며 살결조차 푸르고 검어서 덜 좋더라. 서양 여자를 못 보았으니 모르나 아마 그네들이 좋을 것 같기도 생각된다.”(안석주, 이승만, 1926.6)

조선 여성은 관찰의 대상으로 타자화된 것으로도 부족하여 서구 여자의 육체미에 의해서도 타자화되었다. 우리를 수탈하는 일본 여자보다도 뒷자리에 서고 한 번 보지도 못한 서양여자에 비해서도 단연 추한 몸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이 엄청난 서구지상주의! 서구적 미인이 미의 표준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이미 이 시기부터다. 이 시기 지성인들의 주체성이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여성미란 무엇이고 예술이 또한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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