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예술평론가

꼭 대중가요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예술사에서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여성상 중의 하나가 바로 매춘여성이다.

일제시대 기생(예술을 파는 예기藝妓까지를 포함한 기생 모두를 매춘여성이라고 묶어버리기는 쉽지 않지만, 미모를 파는 화초기생이 남성에서 미모나 미소, 술시중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넓게 보아 매춘여성으로 분류할 수는 있다)으로부터 시작하여, 해방 후 양공주, 술집 작부, 창녀촌의 창녀, 요정 접대부, 호스티스, 콜걸, 티켓다방 종업원, 단란주점의 접대부 등등,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매춘여성의 종류만 가지고도 가히 '매춘의 사회사'를 몇 권씩 쓸 만하다.

대중가요에서도, 영화만큼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 따져 보면 매우 화려하다. 우리가 잘 아는 <홍도야 우지마라> 같은 노래가 바로 기생 소재 노래 아닌가.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있었던 홍도는, 부잣집 며느리로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다 쫓겨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백문임은 <춘향의 딸들, 한국 여성의 반쪽짜리 계보학>이란 책에서, 홍도 이야기는 춘향전이 후일담(後日譚)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술집 작부 출신 가수인 이화자는 '연지와 분을 발라 다듬는 얼굴 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중략)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라는 호소력 있는 가사의 <화류춘몽>을 불러 인기를 모았다.

그래도 일제시대의 기생 소재 노래들은, 그래도 격조가 있었다. 적어도 이 노래는 노골적으로 야한 느낌을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기생들의 비극적인 삶을 노래한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옳다.

그런데 해방 후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우선 새로운 종류의 매춘여성이 등장한다. 이른바 양공주나 댄서 계열의 여성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안고'로 시작하는 <댄서의 순정>, '다홍치마 순희'가 전쟁통에 캬바레에서 춤 추는 '에레나'가 되어버린 이야기를 담은 <에레나가 된 순희>, '메리퀸 밤부두에 쌍고동 울 때마다 쓰디쓴 담배연기 내뿜는 마도로스'로 시작하여 '아메리카 상선'에 매달려 우는 부둣가 양공주를 그린 <메리퀸> 같은 노래가 등장한다.

종류만 달라지는 게 아니다. 태도도 달라진다. 적어도 일제시대 기생 노래에는 호객행위의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1960년대 노래들은 호객행위의 느낌이 있다. '오랜만에 오셨습니다 (중략) 뭐라고 부르리까 먼 데서 오신 손님'(<먼 데서 오신 손님>), '오실 땐 단골손님 안 오실 땐 남인데'(<단골손님>) 같은 노래들을 보면, 나는 당시에 정말 대중가요 검열을 했는지가 의심스럽다. 나는 검열에는 반대하지만, 검열이 있었던 당시에 도대체 이런 노래를 걸러내지 않고 뭘 했는지 알 수가 없다.

1980년대가 되면 그 양상은 훨씬 교묘하고 심각해진다. 우선 1980년대의 노래부터는 매춘여성 소재의 노래라고 단정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노래의 정서나 정황을 살펴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게 타당한 노래들 말이다. 예컨대 방미의 <날 보러 와요>(팝송 <원 웨이 티켓>을 개사한 노래)의 '외로울 때 나를 보러오세요', '깊은 밤 잠 못 들 땐 전화를 해요', '언제든지 나를 보러 오세요' 같은 가사에서 콜걸의 호객행위를 연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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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영동과 신사동에 관한 노래를 불렀던 주현미.▶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그 지리적 배경이 바뀌는 것도 흥미롭다.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나 <신사동 그 사람>은 1970년대 강남 개발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영동과 신사동이 신흥 향락업소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되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생각해 보라. '시간은 자정 너머 새벽으로 가는데' '희미한 불빛 사이로 마주치는 눈길'을 주고받은 그 사람을 기다리는 여자라면 직업이 뭐겠는가 말이다.

문희옥의 <사랑의 거리>는 더 노골적이다. '여기는 남서울 영동 사랑의 거리 (중략) 외롭거나 쓸쓸할 때는 누구든지 한번쯤은 찾아오세요 아아아 여기는 사랑을 꽃피우는 남서울 영동' 같은 가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트로트가수로 데뷔한 문희옥 이미지 때문에 '영계'의 호객행위의 느낌을 지우기가 힘들다.

1980년대의 이런 노래들에는, 이제 매춘여성의 삶의 고통은 없다. 그나마 1960년대의 노래에는 겨우겨우 남아 있던 고통스러운 삶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노골적인 호객행위와 향락적 느낌만 남아 있다. 자학과 자기연민이 뒤범벅된 극단적 비애감을 담았던 트로트 장르가, 주현미와 문희옥에 이르면 정말 아무런 비극적 느낌 없이 '쿨'해져 버린다.

노래가 우리 삶을 담아내는 그릇인 바에야, 우리 사회 깊숙이 들어와 있는 매춘이 노래에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어떤 태도로 그려내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적어도 1980년대 노래보다는 일제시대 노래가 훨씬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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