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생존자입니다]
가정폭력 생존자 김율씨
경찰까지 출동했던 폭력아빠
연 끊고 살다 중환자실서 재회
알고보니 조현병·뇌병변장애
“미웠던 아빠가 사회적 약자...
아빠도 고의는 없었겠구나
이해하고 극복했어요
‘피해자’로만 머물 수 없어
불행에 매몰되지 않고
열심히 내 인생 살래요”

2019년 8월 9일 김율(28)씨와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절연을 선언했던 딸은 이제 아버지의 하나뿐인 보호자다. ⓒ여성신문/김율씨 제공
2019년 8월 9일 김율씨와 아버지가 함께 찍은 사진.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절연을 선언했던 딸은 이제 아버지의 하나뿐인 보호자다. ⓒ여성신문/김율씨 제공

가정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감싸 안았다. 김율(28)씨가 택한 길이다.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가 환자임을 깨닫고 받아들였다. 누군가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지만, 이렇게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도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와 화해하고, 아파하는 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 씩씩한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들었다.

김씨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자랐다. 성인이 돼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살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중환자실에서 본 아빠는 많이 마르고 치료가 필요했어요. 뇌병변 장애인 판정을 받으셨죠. 누군가 아빠를 돌봐야 했어요. 아버지 곁에 남은 사람은 연로한 할머니와 저뿐이었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보호자가 됐다. 3년째 요양병원에 있는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그와 아버지의 관계를 아는 주변인들은 경악하거나 반대했다. 김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제 선택을 존중했으면 좋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아버지를 용서했느냐고 물었다. 김씨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해하고 극복했다”고 답했다.

“제가 겪은 폭력은 변치 않아요. 하지만 아빠가 아프고 약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알자 이해가 됐다고 할까요. 망상, 판단력 미숙, 공격성.... 다 조현병 증상이더라고요. 아빠가 나쁜 사람이거나 날 사랑하지 않아서 때렸다고만 생각했어요. 이제는 그게 아빠에게도 자연재해 같은 일이었겠구나, 악의나 고의는 아니었겠구나 생각해요. 더 빨리 알았다면, 아빠가 일찍 도움을 받았다면 우리는 행복했을 거예요. 오히려 죄책감도 느꼈어요.”

9월8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서 만난 김율씨. ⓒ홍수형 기자
9월8일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에서 만난 김율씨. ⓒ홍수형 기자

아버지의 폭력은 그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아픈 기억을 지우려 하기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되물었다. 가해자를 증오하기보다, 왜 다른 가족들은 그를 외면했는지, 왜 공권력은 개입하지 않았는지, 왜 필요한 경제·사회적 지원을 받지 못했는지 생각했다.

김씨는 종종 가스와 전기가 끊기는 집에서 살았다. 초등학생 땐 난방비를 아낀다고 한겨울에 뜨거운 물을 담은 페트병을 안고 잤다. 식구는 김씨, 아빠, 할머니뿐이었다. 이혼해 따로 사는 엄마나 친척들과는 별다른 왕래가 없었다.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신청할 수 있었는데 아버지가 싫다며 거부했다. 끼니는 동사무소에서 주는 결식아동 쿠폰이나 학교 자원봉사 대가로 받은 무료 급식으로 해결했다.

아버지의 구타는 10대 때 시작됐다. 17세 때 이웃의 신고로 경찰이 왔다. “두 분이 잘 해결하시라” 하고는 가버렸다. 할머니는 “어쩌겠니, 네가 참고 살아야지”라고 했다. 그런 말들이 김씨에게 보내는 신호는 명확했다. 누구도 나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나를 도울 사람은 나뿐이다. 김씨는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월세방을 얻어 탈출했다.

“지금 생각하면 왜 우리가 그렇게까지 고립돼야 했나 싶어요. 지원을 받을 길이 있었을 텐데 무기력하기만 했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방법도 몰랐고 그럴 생각도 못 했어요.”

10대 때 경험한 빈곤·가정폭력
가해자 증오하기보다
사회안전망 ‘구멍’에 주목
아픈 이들에 먼저 손 내미는
상담·예술 활동 시작해

김씨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폭력의 기억은 힘이 셌다. 지금도 중년 남성이 화내는 모습이나 쨍그랑 깨지는 소리엔 두려워 심장이 뛴다. 자아존중감이 바닥을 기던 때엔 폭력적인 남자들과 교제하며 자신을 상처 입혔다. 자립해 잘살아 보려 노력했지만, 다시 만난 아버지는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사과는커녕 ‘내가 언제 때렸냐. 너 정도면 맞고 산 것도 아니다. 팔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니지 않냐. 난 더 심하게 맞고 자랐다’며 부정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제 나이 고작 스물여섯이었어요. 어쩌면 몇십 년간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는데 벌써 지쳐선 안 되겠다 싶었죠. 제 상처부터 치유해야겠더라고요.”

지난 3년간 적극적으로 내면의 힘을 길렀다.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가정폭력 생존자 예술치유 프로그램인 ‘마음대로, 점프’ 활동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김씨는 2020년 합류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른 생존자들이 어울려 춤을 추고 노래하고 합동 공연도 했다. “피해자란 단어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용감하게 잘살고 계신 분들이 많아요. 그게 정말 위로가 돼요.”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김율씨도 이날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김율씨도 이날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김율씨도 이날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2020년 11월25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마음대로, 점프!’ 첫 단독공연이 열렸다. 김율씨도 이날 노래와 춤을 선보였다. ⓒ한국여성의전화/김희지 작가

가정폭력 생존자는 이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상담사가 됐다. 김씨는 지난해부터 서울 은평구 서울청년센터 ‘은평오랑’에서 고민상담 프로그램 ‘속마음반상회’를 운영 중이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의 온라인 고민상담소 ‘하이데어’, 서울시 ‘청년주거상담센터’에서도 상담 활동 중이다. 안정적인 수입을 얻진 못해도, 다른 생존자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 돕는 사회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 그에게는 “치유의 과정”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몸짓과 노래로 표현하는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예술문화교육 프로그램 ‘야생뮤직크루’에서 활동 중이며 2018년 첫 소품집을 발표했다. 올해 ‘2021 아르코 청년예술가’, ‘청년인생설계학교 프로젝트 코스’ 등 지원사업에 선정돼 신곡도 발표할 계획이다. 이달 말부터 자작곡 ‘피해자다움’ 녹음에 들어간다.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기대하는 피해자의 모습은 무엇이고 어떻게 정의하나?’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내가 잘못된 걸까, 나는 왜 이러지’ 등 자책하며 고통받는 생존자들이 없길 바라며 지은 노래다.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마음대로, 점프’ 전국 순회공연도 준비 중이다.

김율씨는 지난해부터 서울 은평구 서울청년센터 ‘은평오랑’에서 고민상담 프로그램 ‘속마음반상회’를 운영 중이다.  ⓒ여성신문/김율씨 제공
김율씨는 지난해부터 서울 은평구 서울청년센터 ‘은평오랑’에서 고민상담 프로그램 ‘속마음반상회’를 운영 중이다. ⓒ여성신문/김율씨 제공
김율씨가 2018년 11월4일 서울시 관악구 딥숲에서 열린 자신의 첫 소품집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륵’ 쇼케이스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여성신문/김율씨 제공
김율씨가 2018년 11월4일 서울시 관악구 딥숲에서 열린 자신의 첫 소품집 ‘낙엽만 굴러가도 꺄르륵’ 쇼케이스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여성신문/김율씨 제공

“‘피해자’로만 머물 수 없어
불행에 매몰되지 않고
열심히 내 인생 살래요”

“이제 아빠가 내게 사과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사실 전 아빠를 사랑하나 봐요. 그 마음을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

가정폭력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김씨는 “가정폭력 트라우마는 40년까지도 이어진다고 하니 살다 보면 다시 상처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언제까지나 ‘피해자’로 머물 수 없잖아요. 내 불행에만 매몰되지 않고 열심히 살래요. 제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도 있겠죠.”

다른 생존자들에게 그는 말했다. “무서우면 도망쳐도 됩니다. 힘들어해도 돼요. 회복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도 돼요. 그게 당신의 권리이고, 마땅히 그래야 하거든요. 괜찮아질 거라고 쉽게 말할 순 없어요. 분명한 건 좋아질 거라는 것, 그리고 또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내 부모와, 폭력 가해자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요.”

내면의 힘 기른 여성들, 가정폭력 피해자 편견 깨다
여성주의 상담·조력 통해 주체적·사회적 연결감 중시하는 ‘스라이버’로 거듭나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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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폭력에서 벗어난 후, 서로 연대하며 주도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려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가정폭력은 치유나 극복이 어려울 거라는 편견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회복탄력성과 새로운 삶의 방식은 ‘피해자’나 ‘생존자’라는 틀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고, 우리 사회가 이 여성들을 도울 책무가 있다는 내용의 논문도 최근 발표됐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김홍미리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연구위원이 2020년 12월 발표한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학위 논문 「가정폭력 피해 여성의 자기탈환(Reclaiming-Self) 여정을 통해 본 사회관계규범의 재구성과 관계적 자율성 실천에 관한 연구」다.

김 연구위원은 가정폭력을 겪은 30~50대 여성 14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이들은 삶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가해자의 통제 논리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폭력을 통해 정의된 자신을 정의하기보다 자신의 강점과 미래계획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을 “생존자에서 스라이버(thriver)로의 이동”이라고 부른다. 스라이버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생성하는 연결감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 연구위원은 “이들은 모두 여성주의 상담을 지향하는 피해자 지원기관의 조력 속에서 폭력 관계에서 벗어났다”며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여성들의 상황은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를 위한 여성주의 상담·지원 프로그램이 더욱 보편화되고, 문턱도 낮아져야 하는 이유다. 그는 “안전감 속에서 자율성을 연습할 수 있는 모델을 제안하고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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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신문은 <내 이름은 생존자입니다> 기획 보도를 통해, 조명받지 못한 젠더폭력 ‘생존자’의 목소리를 보도함으로써 인권 증진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됐습니다.

▶ [친족성폭력 생존자] 아빠·오빠의 죗값 묻지 않는 사회, 우리가 바꾼다 www.womennews.co.kr/news/212189

▶ 성폭력·인권침해 견뎌야 하는 학교, 지금 아니면 언제 바꿔? www.womennews.co.kr/news/213463

▶ 학대받던 딸, 아빠의 ‘보호자’가 됐다 www.womennews.co.kr/news/21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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