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도산의 배우자
미국서 헌신하며 독립 밑거름

독립운동가이자 도산 안창호의 배우자인 이혜련 여사.
독립운동가이자 도산 안창호의 배우자인 이혜련 여사.

도산 안창호의 아내로 먼저 다가오는 이혜련, 미주에서는 남편 성을 따라서 안혜련으로, 그리고 미국명 헬렌 안(Helen Ahn)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내조하고 재미한인의 민족운동을 지도했으나 이혜련은 2008년에 와서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1884년 4월 21일 평남 강서군에서 서당 훈장을 하는 이석관의 맏딸로 출생한 혜련은 8세 되던 해인 1892년 어머니를 여의었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이 그러했듯이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고모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며 집안에서 살림하고 동생들 시중을 드는 것이 일상이였다. 혜련의 삶에 획기적 변화가 일어났다. 1897년 혜련이 14살 되던 해에 장안에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도산 안창호와 약혼을 하고 기독교 미션스클인 서울의 정신여학교로 유학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점진학교를 세우고 학교를 운영하며 여러 가지 교육과정을 실험했으나 한계를 느꼈던 도산은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10년간 유학을 다녀온 후 결혼하겠다고 혜련에게 통보했다. 그러나 혜련은 무조건 도산을 따라 나서기로 결심했고 아버지는 빚을 내어 딸의 여행 경비를 마련해 주었다.

1902년 9월 3일, 만 18세의 혜련은 구리개의 제중원에서 밀러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혜련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어느 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한국에서 선교사를 하던 알렉산드로 다머 드류(Alessandro Damer Drew, 유대모, 남장로교)를 우연히 만나 그의 집의 집사로 취업하고 혜련은 드류 집에서 청소하고 음식을 조리하며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아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단발한 유학생들과 상투머리를 한 인삼 상인들이 까까중이니 상투쟁이니 하며 서로 조롱하고, 영업 영역 다툼으로 상투를 붙잡고 싸움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한 도산은 1903년에 한인들의 첫 결사인 한인친목회를 출범시켜 중국인 예배당을 빌려 예배하며 친목을 도모할 당시 예배에 참석한 여성은 혜련과 장경의 부인뿐이었다. 도산은 한인친목회를 기반으로 1905년 4월 5일에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공립신보(共立新報)를 창간해 한인커뮤니티의 언론 문화의 새로운 출발을 이루어 나갔을 때에 혜련은 맏아들 필립을 출산했다. 

혜련과 큰아들 필립. 아들이 백인에게서 얻어입힌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있다.
혜련과 큰아들 필립. 아들이 백인에게서 얻어입힌 여자아이 옷을 입고 있다.

“당신은 애국자요” 도산 격려

1906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나 회관 건물이 불타버리는 재난을 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일단의 한인들이 집단적으로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 일자리를 마련하였다. 파차파 한인 캠프를 만들어 공동체를 이루었고 고된 노동 중에 국권을 강탈당한 고국의 암울한 소식이 전해지자 1907년 1월 초순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신민회를 결성하고 위기에 처한 고국을 구하고자 도산의 한국행이 결정되었다. 가족을 두고 떠나기를 망설이는 남편에게 혜련은 “당신은 애국자요 영걸의 인물로서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라고 격려하며 큰 용기를 주었다. 국내에서 신민회의 구국운동을 펼치며 동시에 공립협회 회장으로 지도력을 발휘해 1908년 7월까지 미주 서해안 일대에 9개 지회와 800여명의 회원을 거느릴 정도로 공립협회는 급격히 성장했다. 혜련은 뛰어난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로 일감을 얻어 생활했으나 지인들 사이에서 ‘우는 아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 때를 생각하며 혜련은 “그저 동포들 만나면 인사가 우는 것이었쇠다. 그 때 너무 많이 울어서 그 후에 더 심한 고통이 왔지만 그렇게 울어보지는 않았쇠다”라고 회상했다.

어느 순간 혜련은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에 사는 오렌지 농장 노동자들의 대모가 되어 있었다. 1911년 9월 미국으로 돌아온 도산은 공립협회가 발전한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장으로서 여러 곳의 한인사회를 방문했는데 리버사이드로 와서 오렌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기도 하기도 하고 파나마 운하 건설 노동자로 일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1912년 7월 리버사이드 파차카캠프에서 둘째아들 필선이 태어났다. 그러나 충분한 산후 조리를 할 여유도 없이 혜련은 병원에서 조리사로 일하고 백인 집의 세탁물을 맡아 빨래를 하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신민회 동지 이갑의 대한제국 군인 시절 모습.
신민회 동지 이갑의 대한제국 군인 시절 모습.

삯바느질로 모은 돈 동지에게

남편의 신민회 동지 추정 이갑이 러시아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외교활동 중에 전신마비가 오자 그를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해 미국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여행 경비 일체를 지원했으나 이갑 일행(서초와 최광이 동행함)이 시베리아, 유럽을 경유해 뉴욕항까지 겨우 도착했지만 상륙을 거절당하였다. 악수만 할 수 있어도 상륙시켰주겠다고 했건만 이민국 관리의 손을 끝내 잡지 못한 것이다. 시베리아로 돌아간 후에도 1000달러 정도의 치료비를 이갑에게 보내주었고 이중에 약 300불에서 500불 정도의 큰돈이 혜련이 삯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모아 적금한 돈이었다고 전해진다. 남편의 동지를 위해 피땀으로 모아온 돈을 담대하게 내놓았고 이 돈을 받은 이갑은 감격하여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만주와 시베리아를 무대로 항쟁한 한인 독립운동은 러시아와 함께 승전국 편에 선 일제의 탄압을 받아 침체에 빠졌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파리강화회에서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의 대한인국민회는 파리 강화회의 한국 대표 파견을 위해 저력하던 중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듣게되면서 독립을 선언한 대한인국민회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동포사회에 선포했다. 1915년 1월 수산이 태어나고 1917년 5월 수라가 태어나 2남2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도하기 위해 상하이로 향하는 남편과의 이별은 혜련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었다. 상하이로 떠나기 전 도산은 헤련과 미주의 여성계를 향해 미주의 모든 여성 단체들은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해 통일적으로 활동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8월 5일 다뉴바 장로교회에 모인 각지 여성단체 대표들은 대한여자애국단을 창단했다. 16세 이상의 미주 여성들은 대한여자애국단으로 결집했으며 혜련 또한 대한여자애국단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3,1운동 당시 약 8000명 가량의 한인들은 산업노동자들과 농장노동자들이 대부분으로 한 달 수입이 평균 30~35달러 정도로 한 달 생활하기에도 빠듯한 수입이었으나 한인들은 교회와 학교를 지원하고 인두세 및 각종 명목의 독립의연금을 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함을 자부심으로 느끼는 애국심으로 무장됐다. 혜련은 대한애국부인회로 통합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 대한부인친애회에서 활동했으나 대한여자애국단이 출범한 이후에는 로스앤젤레스로 총부를 이전하면서 총부 및 지부에서 활동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임시정부로 보낸 독립자금은 모금하면서 여성들에게 빈한한 생활 속에서 절용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하와이와 북미 등지의 여성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한국 독립운동이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단언할 만큼 독립운동사에서 재미여성들의 헌신은 재평가돼야 한다. 1919년도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결산서의 수입금 명세내용을 보면 대표의연, 독립의연, 21일예금(二十一例金), 애국금, 공채금, 인구세 등의 명목이 있는데, 여성들은 의무금과 의연금 모금에 적극 참여하였다. 자연재해로 어려움에 처한 고국 구제운동과 1932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현충사를 중건하기 위한 성금 모금운동에도 여성들은 적극 참여하여 성금을 모아 한국으로 보냈다. 혜련 또한 ‘안혜련’ 혹은 ‘안부인 혜련’의 이름으로 국민의무금, 二十一예납금, 국민회 보조금, 특별의연에 참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1917년 도산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멕시코 동포사회 순방을 떠나기 전의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필선, 도산, 수라, 필립, 수산, 이혜련.
1917년 도산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멕시코 동포사회 순방을 떠나기 전의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필선, 도산, 수라, 필립, 수산, 이혜련.

흥사단원 돌보며 청소일까지

한편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신민회 청년학우회의 정신을 계승한 흥사단이 출범했고 흥사단 역시 로스앤젤레스로 본부를 이주해 1915년부터 로스앤젤레스 피게로아(106 North Figueroa St.)에 단소를 두고 1932년 봄에 카타리나(3421 South Catalina St.)로 단소를 이전했는데 이들 흥사단소는 혜련 가족들의 거유지이기도 했다. 1층에는 흥사단사무소와 한구석에 도산가족들의 공간이 마련됐고 2층에는 서무원을 비롯한 침실이 있는 공유 공간이었다. 흥사단사무소와 가족의 생활공간이 동일했기에 집안은 흥사단원들과 국민회 동지들, 부인들과 유학생들로 언제나 붐볐다.

 

중요한 한인 행사가 열릴 때면 모임 장소로 제공되기도 했고 단소 안에 국어학교가 설치되기도 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재미한인들은 일본 국적으로 참가한 한인 선수를 위한 환영회 석상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목격한 권투 선수들과 마라톤 선수들은 혜련의 집을 방문하였다. 도산 안창호 가족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자료 중에 충칭에서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가 1941년 3월 16일자로 미주의 동포 청년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묵필로 쓴 태극기가 있다. 벨기에 신부 매우사(샤를 메우스)가 미주로 길에 한인동포들에게 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인데 매우사는 미국을 떠나기 전 이 태극기를 혜련에게 선사했다. 이렇게 한국인들이 혜련의 집을 방문하는 의미는 한민족임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인이었고 혜련은 모든 방문자들을 온 마음으로 환영하고 정성껏 접대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또한 일요일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이들이 혜련의 집으로 몰려와 밥뿐만 아니라 김치도 충분히 마련해 두어야 했기에 혜련은 부유한 백인들의 집을 밤낮으로 청소하고, 세탁하고, 바느질을 하거나 요리를 해주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항상 손님을 대접할 음식을 장만해야 했기 때문에 돈이 떨어진 적도 많았다. 수산의 찬구 루스 아버지의 상점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주어 “그 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굶주렸을 거예요”라고 회상했고 필립은 “캐비어를 삶아 아침 먹고 포테이토를 삶아 저녁 먹었지요. 우리 식구 배고파 많이 울었지요”라고 회고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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