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계 미투 1호’ 김은희씨
가해자 상대 손배소 승소 확정
대법 “성범죄 손해 청구 시효,
외상후 스트레스 진단 이후로”

김은희 테니스 코치 ⓒ홍수형 기자
5년 간의 법적 투쟁을 최종 승소로 마무리 지은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환하게 웃었다. 김은희씨의 승리는 개인의 권리구제를 넘어 성폭력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으로 적극적으로 손해배상청구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홍수형 기자

대법원이 20년 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피해생존자에 대해 손해배상을 인정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뒤늦게 발생한 경우,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10년)는 PTSD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진행된다고 본 것이다. 체육계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린 ‘체육계 미투 1호’인 김은희(30) 테니스코치의 이번 승소 판결은 성폭력 민사소송에서 PTSD 진단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인정한 최초의 대법원 판결로, 성폭력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현실화했다는 점에서 뜻 깊다.

재판의 쟁점 ‘소멸시효’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지난 8월 19일 김씨가 성폭력 가해자인 테니스 코치 A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상고심에서 김씨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김씨의 손해배상청구권 소멸시효가 김씨가 처음 PTSD 진단을 받은 2016년 6월부터 계산돼야 한다는 2심 판단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소멸시효의 기준이 되는 ‘불법행위를 한 날’은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해 현실화된 때를 의미한다”며 “김씨가 전문가로부터 PTSD가 발현됐다는 진단을 받은 때 손해가 현실화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피해자 더 이상 나오면 안된다” 고소 결심

초등학생 테니스부 코치였던 A씨는 2001~2002년 초등학생 4학년이던 김씨를 여러 차례 성폭행했다. 성인이 된 김 코치는 2010년 ‘조두순 사건’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면서 그제야 자신도 아동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10년이 지난 사건이라 수사가 어렵다”는 말에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2016년 5월 한 테니스 대회에서 어린 아이들을 지도하는 가해자를 맞닥뜨리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과거의 끔찍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단기 기억상실과 수면장애에 시달리던 그는 그해 6월 병원에서 PTSD 진단을 받았고, 가해자를 강간치상 혐의로 고소했다. “나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나오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법적 투쟁에 나선 것이다. A씨는 2018년 10월 징역 10년형을 확정 받고 복역 중이다.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 손해배상청구

김씨가 형사소송에서 승소한 뒤 민사소송을 진행하려고 “쉽지 않다”며 만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민법 제766조 2항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또는 ‘불법 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다. 김씨가 마지막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시기는 2002년 8월으로 소송을 제기한 2018년은 성폭력 시점으로부터 16년이 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김씨는 멈추지 않았다. “성범죄로 인해 고통 받는 피해자들을 위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해 판결문을 받고 싶었다”고 했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는 통상적으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나 지인에 의한 성폭력 피해가 많고 성폭력 피해를 성인이 된 뒤에 뒤늦게 인지하기도 한다. 성폭력이 멈춰도 성폭력 후유증은 지속되지만, 그동안 법원은 사건 발생일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왔다. 소멸시효로 인한 배상청구의 어려움과 한계는 성폭력 피해자가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데 걸림돌로 작동했다. 

1심은 A씨가 대응하지 않아 김씨가 승소했다. 항소심에서 A씨는 “마지막 범행일인 2002년으로부터 10년이 넘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항소심은 “손해배상 청구 소멸시효 기산일은 손해 발생이 현실적인 것이 됐을 때를 의미한다”며 “피고의 불법 행위에 따른 원고의 손해는 원고가 처음 진단받은 2016년 6월에 현실화했다”고 판단했다.

김씨는 이번 승소를 통해 성폭력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 시한인 10년이 지났더라도 정신적 피해를 비롯한 후유증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상징적인 판결을 이끌어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이번 판결은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권리보호 의지를 보여줬다”고 환영했다. 이어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손해배상으로 피해자가 피해 이전으로 회복될 수는 없겠으나 피해자가 조금이나마 치유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이자 유일한 법적 구제방법”이라고 말했다.

한국여성의전화 김다슬 여성인권상담소 팀장은 “피해자가 미성년이거나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경우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아동·청소년기에 성폭력을 당했으나 성년이 된 후에도 짧게는 10여 년부터 길게는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며 법적 해결 방법을 문의하는 상담이 최근에도 끊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어 성폭력 피해자가 민사소송으로 더욱 실질적이고 적극적으로 손해배상청구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려면  피해자 연령, 특성,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소멸시효 기간을 늘리는 방안과 형사소송 시 보장받는 피해자 개인정보보호를 민사소송에서도 보장받을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5년 간의 법적 투쟁을 최종 승소로 마무리 지은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환하게 웃었다. 김씨의 승리는 개인의 권리구제를 넘어 성폭력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으로 적극적으로 손해배상청구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김씨는 “이번 승소는 잘 된 일이지만, 행운이라고 할 만큼 이례적인 판결이기도 하다”며 “많은 피해자들이 이번 판례에서 승소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으나 이런 희망이 실망이나 좌절로 이어지진 않을까 걱정도 된다”고 했다. 모든 사건이 동일하지 않고, 판사에 따라 다른 판결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테니스코치로서 실내테니스장을 열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형사부터 민사소송까지 5년간 이어온 법적 투쟁도 드디어 막을 내렸다. 그는 지난 시간을 통해 “단단해졌다”고 했다. “피해자 김은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김은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결론은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살면 된다라고 내렸어요. 내가 뭘 할 때 힘들고, 뭘 할 때 즐거운지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