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독립운동가]③
해외 여성독립운동가의 독립을 향한 행진

3년 전 필자는 해외 여성독립운동가 활동지를 방문해 한인 묘지를 찾은 적이 있다. 그 곳에 서는 순간, 가슴이 저려와 주변을 맴돌며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묘지 구석진 곳의 표지석에는 비뚤하게 한글로‘대한 충청도, 대한 경성…’고향 지명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석 한 쪽을 채운 한복을 입은 여인 사진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내 뺨에는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태평양을 넘어 타국에서도 잊지 않았던 대한(大韓), 그녀들은 해외에서 만난 독립운동가였다. 

미국 하와이 오하우 공동묘지.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미국 하와이 오하우 공동묘지.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한복을 입은 한인 여성의 묘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한복을 입은 한인 여성의 묘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국내외 애국부인, 그들은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사 곳곳에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재조명이 필요하다. 1920년 11월『대련신문』에는「대한부인결사체포」기사가 실렸다. 체포된 부인들은 평양 애국부인회 여성이었다. 평양에서 조직된 부인회 단체에서 여성 100여명이 임시정부에 군자금 2,000여원을 모집하여 보낸 것이 발각되었는데 전국에 지회를 두었던‘대한애국부인회’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1919년 한영신의 발기로 조직된 장로파 애국부인회와 감리파 애국부인회가 통합 조직되었는데 기독교 여성이 중심이었다. 당시 평안도 지방의 교회 수가 6백여 개가 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기독교계 부인회 활동의 범위가 가늠된다. 부인회의 애국활동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경성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부인청년단·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 국외 하와이·미주·상해·훈춘·만주·멕시코·쿠바 등에서 조직된 애국부인회는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지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평양애국부인회 사건. 『동아일보』, 1921년 2월 27일.
평양애국부인회 사건. 『동아일보』, 1921년 2월 27일.

국경을 뛰어넘은 여민애국(女民愛國)

‘국가’라는 거대한 담론 속에 제도와 억압의 틀과 마주한 여성들은 스스로 애국의 힘을 발휘했다. 1898년 9월 11일 홍문 석골 사립소학교에서 시작된 여권신장 논의가 순성여학교 설립으로 이어졌고 20년 뒤에는 규탄의 목소리로 되살아났다. 1919년 4월과 7월「한국여학생이 윌슨 대통령과 미국대사에게 보낸 편지」는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독립의 염원을 강력히 호소한 비폭력저항정신의 상징으로 주목되었다. 그리고 1919년 3월부터 11월까지 조직된 여성단체는 국내외 부인회 주도의 여민애국 실천으로 나타났다. 이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수감자와 재검자 구제에 앞장선 혈성부인회와 조선애국부인회 여주지부 400여명의「부인결사대 활동」, 그리고 멕시코 대한부인회 입단금 1원이 독립의연금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애국의 실천에 경계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사례일 것이다. 대한 여성, 민국시민으로 나아가는 길은 광복이전 70개를 훌쩍 넘은 국내외 여성단체 조직을 통해 한국여성의 독립정신은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먼 타국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독립정신, 민국시민으로 나아간 한국여성의 역사였다. 

혈성단애국부인회.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혈성단애국부인회. 매일신보, 1919년 12월 19일
여주 애국부인회. 『매일신보』1940년 1월 9일.
여주 애국부인회. 『매일신보』1940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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