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평등문화상 수상자 릴레이 인터뷰]
‘우생순’부터 ‘리틀포레스트’까지
‘상업영화 연출 인생 20년’ 베테랑 감독 임순례
2008년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수상

올해 14회를 맞는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 시상식은 2008년 여성신문사가 여성문화예술인들의 성장과 지원을 위해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으로 처음 제정했습니다. 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와 (사)여성문화네트워크가 함께하며 연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난 14년간 총 139명의 수상자를 발굴했으며 많은 문화예술인이 여성문화인상과 양성평등문화상을 통해 문화예술을 통한 젠더인식의 사회적 변화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14회를 맞아 주요 역대 수상자들을 만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더욱 성장한 수상자들의 모습에 많은 기대바랍니다. 매주 공개되는 인터뷰는 11월 온라인 E북(E-BOOK)으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임순례 영화감독 ⓒ홍수형 기자
임순례 영화감독 ⓒ홍수형 기자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전염병은 임순례 감독의 삶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주로 집에서 일하는 상황이 되면서 경기도 양평의 집을 고치는 한편, 지난해 촬영을 마친 영화 <교섭> 개봉이 미뤄지면서 후반작업을 새로 하느라 품을 들였다. 중동에서 발생한 납치 사건을 해결하는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을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황정민, 현빈 등 출연진이 화려하다. 임감독의 ‘인물을 다루는 솜씨’를 기대하게 만든다.

임순례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드물게 20년 이상 상업 영화 연출을 지속해오고 있는 여성 감독이다. 1996년 <세 친구>로 데뷔한 뒤 2001년 시골 밴드를 주인공으로 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단번에 주목받았다. 경계선에 서 있는 인간, 무너지거나 추락하기 직전의 인간들이 지치고 누추한 삶에서 빛나는 순간을 발견하고 승리하는 임감독 영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400만 관객을 동원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으로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그는 2008년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을 수상한 뒤로도 <남쪽으로 튀어>, <제보자>,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리틀 포레스트> 등 다양한 영화를 만들어왔다. 영화 연출뿐 아니라 영화산업 내 성평등을 위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공동대표, 동물권행동 ‘카라’ 대표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리더십을 실천해왔다. 불가마 같은 여름날, 방역단계 강화로 여느 때보다 한적한 찻집에서 임순례 감독과 마주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과 '리틀 포레스트' ⓒ싸이더스·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카라’와 성평등센터 대표로 자기 언어를 갖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오셨습니다.

“<우생순> 만들고 나서 북인도 달라이라마 법회에 갔는데,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더라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씀이 딱 들어왔어요. 제가 일 복이 있는지,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진 시기와 맞아 카라는 큰 성장을 했습니다. 작년에 파주에서 카라 더 봄 센터를 세우고, 동물보호 공간을 만들었지요. 회비 내는 회원이 300명이었는데 지금은 1만 명이 넘어요. 이번에 젊은 활동가에게 넘기고 나왔습니다. 성평등센터도, 내년 3월1일까지가 임기인데, 공동대표였던 심재명 대표에게 맡기고 이번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다 내려놓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신과 몸을 건강하게, 속도와 호흡을 정리해서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는 그냥 흐름에 편승해서 달려온 삶인 것 같아요. 이런저런 흐름 때문에 멀어졌던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교, 동물, 환경, 역사 이런데 관심 많았는데, 관심 있는 일에 대한 공부도 인풋(input)도 없이 뭔가 만들어내는 데 빠듯했습니다. 이제 내가 좀 더 주도권을 가지고 살고 싶어요.”

임순례 영화감독 ⓒ홍수형 기자
임순례 영화감독 ⓒ홍수형 기자

 

한국 영화계에 여성 감독이 많지 않습니다.

“제가 1993년에 <세상 밖으로> 조감독으로 처음 충무로에서 일했어요. 구 충무로 시스템과 새로운 시스템이 충돌하며 섞일 때예요. 여성감독으로 제 바로 앞에 이미례 감독이 있는데, 헤드스탭들이 그분 누르려고 술도 많이 먹이고 음담패설 해대고 그러는데, 그거 이겨내려고 술도 정신 차리고 먹고, 음담패설 더 세게 받아치고 그랬대요. 저도 좀 겪었지요. <와이키키> 때 한 일주일 정도 대작해서 지지 않으니까 그때부터 태도가 조금 달라지더군요.”

충무로 체제 이후로도 여성 감독이 지속해서 작업하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다. 그는 동료, 여성 후배들과 그 시절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길을 내며 이제까지 왔다.

“변영주 감독이 그래요. ‘덩치 크고 술 시합에서 버티고... 언니랑 나랑은 이 시절 그렇게 넘어갔다’고요. 이정향 감독이 그랬어요. ‘여성성을 거세해야 현장에서 살아남는다’고. 여성성 발휘하는 순간 힘들어져서, 자기는 머리 짧게 자르고, 세게 나갔다고요. 2000년대 초반까지 내내 그랬습니다. 그러다 영상원 출신 신세대 감독들 나오고 스태프들 젊어지면서 외견상의 성차별은 좀 없어졌지요.”

성평등센터 든든의 초대 공동대표로 영화산업 내 성차별,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기초를 다졌습니다. 영화산업계의 성차별 현실은 어떻습니까?

“상업 영화에서 성별 분업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헤드 스테프에는 아직도 여성이 적습니다. 영화 작업에서 촬영감독, 미술감독, 피디 등이 보수가 좀 나은데, 기술 스태프 헤드에 여성이 없습니다. 부산영화제, 각종 독립 영화제 이런 데 가서 여자들이 훨씬 잘 만들고 하는데도 상업 영화에서 여성 진입이 힘들어요. 지난 20여 년간 큰 변화가 없어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결국 영화 제작과 배급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대자본으로 크게 만들어 개봉할 때 한 방 때려 박는 시스템에서는 액션 영화, 스릴러 영화를 선호하죠. 장르 영화 잘 만드는 여성 감독도 있지만, 제작자나 감독은 모험 안 하려고 해요. 인맥이라는 사회자본에서 남성들이 연결되는 게 더 강해요.”

해결방안이 없을까요?

“배급 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30억원 안팎으로 만드는 중소 규모 영화를 만들어서 장기 상영이 가능해야 다양한 영화가 나오고, 여성 감독이 활동할 영역이 넓어지는데, 지금 배급 구조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로 스크린을 다 쓸어버리거든요. 다양한 영화가 살아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나 영화진흥위원회가 할 일입니다.”

임감독은 여성 감독의 활동이 확대되려면 영화 제작-배급 구조가 다양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 감독들이 만드는 영화를 보면 남성 감독들보다 비교적 덜 정형화 되어있어요. 윤가은, 김보라 감독 영화는 매번 찾아 보는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예산으로 만드는 이런 영화가 한국 영화의 탄탄한 기반이 될 수 있습니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주연여배우상을 휩쓴 신예 여성감독의 <노마드랜드>에 뛰어난 여배우 프랜시스 맥더먼드가 주연한 것처럼, 저예산 영화에 인지도 있는 배우들이 더 많이 나와주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문단, 공연계 등에서 미투 고발이 잇달았는데 영화산업에서 고용 성차별이나 성폭력 문제는 지금 어떤 단계에 와있습니까?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데서 ‘가해자가 현장에 안 나왔으면 좋겠다’까지, 다양한 문제 제기가 가능해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없었던 일로 하거나 네가 참으라고 하던 일이 이제는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해고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성차별-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공식 창구가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2차 가해입니다. 또 스태프는 거의 프리랜서니까 조직이 보호해주는 게 없고, 그런 데서 오는 한계를 넘어야 할 것입니다.”

조용한 카페에서 나직나직 답하는 그는 작은 질문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게 꼭 맞는 단어를 골랐다. 광대뼈가 올라가도록 크게 미소 짓기도 하는 그에게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역사 속 중요한 인물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김구 선생 암살 사건, 안두희와 안두희를 죽인 사람, 그런 인물이나 고종 때 헤이그 밀사로 간 이위종 같은, 역사에 휘말린 인물을 그려보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카라 12년 대표가 키우는 개에 대해 물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 온 믹스견입니다” 개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활짝 웃었다.

임순례 감독과 고양이가 나란히 앉아있다.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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