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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엄마와 나.

 

[나의 엄마 이야기] ⑥ 이은애 양평경찰서장의 어머니 지영희씨

당신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요. 시간의 원을 돌고 돌다보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엄마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엄마야말로 리더십 에너지의 원천이었고, 어떤 리더보다 더 큰 리더였던 존재였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엄마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나는 엄마가 꽤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나에게 여자의 몸가짐, 여자의 덕목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었잖아. 자칭 양반가문의 맏며느리로 들어와, 딸만 내리 셋을 낳아 고생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 큰언니가 결혼하고 첫아들을 낳았을 때 엄마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던 것 같아. 지금도 가끔 ‘결혼하고 아이 낳는 것도 여자의 큰 행복’이라면서 비혼을 고집하는 나를 은근슬쩍 떠보기도 하잖아.

근데 엄마, 나를 이렇게 강하게 키운 건 엄마야. 나는 페미니스트인 내가 몹시도 자랑스러우니, 지금쯤 엄마한테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엄마는 아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지금의 나를 키운, 엄마가 주인공이었던 그 장면들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

초등학생인 나는 피아노 학원을 가려고 가방을 들고 마루에 서 있었어. 할머니가 갑자기 내 가방을 빼앗아 던지면서 말했지. “쓸모없는 딸년들에게 돈을 퍼붓는다.” 말단 공무원인 아빠 월급으로만 살기에는 살림이 빠듯했을 거야. 딸 셋 모두 머리를 짧게 잘라 키운 것은 샴푸 값을 아끼기 위해서였으니까, 그 살림살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엄마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가방을 나에게 주면서 말했어. “피아노 열심히 치면 머리 좋아져. 열심히 하고 와.” 손가락 끝을 자극하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을 굳게 믿은 엄마는 그 어려운 살림에도 우리 딸 셋 모두를 아주 오랫동안 피아노 학원을 보냈지. 고마워, 엄마 덕분인 거 같아. 내가 공부는 곧잘 했잖아.

명절이면 가던 친척 집이 있었어. 명절 때면 수십 명이 북적거렸는데 어른 남자는 안방, 아이 남자는 마루에서 밥을 먹었어. 여자들 자리는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이었지. 집이 작아서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서 모일 수도 없었잖아. 어느 해인가 그 친척은 집을 아주 크게 지었어. 마루도 넓고 부엌도 넓게. 그런데 그 해 명절에도 여전히 여자들의 자리는 부엌이었어. 엄마는 우리 세 딸을 데리고 나오면서 아빠에게 말했지. “이제 우리 이 집에서 밥 먹지 말아요.” 엄마 덕분이야. 내가 나를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엄마가 그 집 현관문을 나서면서 내 손을 잡을 때 느꼈던 그 강건함을 기억하기 때문일 거야. 그 집은 아직도 남자는 마루에서, 여자는 부엌에서 밥을 먹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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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경기서우회전에 출품한 작품 앞에 선 지영희씨.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뛰쳐나온 적 있는데 기억해? 우리 반 아이들이 자율학습 시간에 너무 떠든다는 이유로 담임선생님이 반장이었던 나를 불러서 때렸어. 훈육도 아니고 사랑의 매도 아니고 그냥 폭행일 뿐이었어. 나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그대로 교실에서 나와버렸고, 그 장면을 본 반 친구들도 하나둘씩 책가방을 들고 집으로 가버렸어. 담임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전화해서 난리를 쳤고, 아빠는 나의 버릇없음을 혼내면서 당장 담임한테 전화해서 사과하라고 했었잖아. 평소 엄마는 아빠 의견을 따르는 편이었는데 그때만큼은 아빠에게 단호하게 맞섰어. “은애야, 사과하지 마. 사과는 선생이 해야지.” 결국 나도 담임도 사과하지 않고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해 아빠와 맞서는 엄마가 정말 멋져 보였어.

엄마는 엄청 좋은 학벌을 가진 것도 아니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아닌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엄마는 누구보다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고, 부당함을 참지 않는 사람이었어. 엄마는 여성학을 배우지도 않았고, 지금도 여자가 팔자걸음을 걷는다고 가끔 잔소리하지만, 딸 셋 모두를 자존감 빵빵한 페미니스트로 키워낸 걸 보면 엄마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닐까?

아빠에게 당당하게 부부별산제를 요구하고 자신만의 통장을 가지고 있는 엄마, 누군가의 아내보다는 국전서예작가 蘆田 지영희로 불리는 걸 좋아하는 엄마, 그리고 여전히 딸들의 삶을 온전한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엄마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엄마의 통장과 엄마의 이름과 엄마의 인생을 나도 진심으로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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