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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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이거…”

몇 달 전 서울 손님들이 ‘가야겠다’고 일어서면서 앙증맞게 작고 예쁜 쇼핑백을 내밀었다.

“에고~ 뭐야?”

“이거 립스틱인데… 선생님 요새 화장 안 하시는 건 아는데…”

“가끔은 해. 뭐든지 주기만 해! 호호호…”

그런데 준 사람이 염려한 대로 내가 립스틱 바를 일이 있겠나... 그래도 마음이 고맙고 기뻤다. 손님들 떠나가고 선물은 딱히 소용되는 물건이 아닌지라 펴보지도 않은 채 경대 앞 한구석에 놓고는 잊어버렸다. 그러다가 먼 곳에서 손님 온다하여 방방이 청소를 하다가 그 앙증맞은 선물 봉투가 눈에 띄었다.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할까?”

쇼핑백 안에는 아주 예쁘게 포장한 곽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쪽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 가끔씩 하시는 선생님의 화려한 외출에
조금이나마 한 몫 하고 싶은 생각에 준비했어요.
건강하세요.”

여기서 <화려한 외출>이라 함은 일 년에 한두 번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 같은 풀각시의 특별한 나들이를 말함이리라. 나비 팔랑이는 예쁜 포장지를 뜯으니 진달래 빛 립스틱이 나온다.

“어? 이건 스틱이 아니라 붓이 달렸네… 요샌 이렇게 나오나?”

화려한 외출이라…? 갑자기 마음이 동한다.

옷장 문을 열고 시골에 내려온 후로 몇 년 째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 걸려 있는 옷들을 훑어본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아꼈던 비즈 장식이 있는 검정색 실크 투피스. 꽤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음… 검정 드레스에 어울리는 빨간 핸드백… 요놈도 내가 애용하던 것… 빨간 핸드백과 맞춘 빨간 구두… 이건 예쁘긴 하지만 걷도록 만든 신발은 분명 아니었다… 뒷굽이 높아 발 무지 아팠다. 특별한 행사 있는 날에만 신었다는… 아, 액세서리, 난 큼지막한 귀걸이가 참 좋더라.

립스틱 짙게 바르고 커다란 귀걸이까지 달고 외출을 한다.

어디로 간다? 가까운 예당 저수지 근처 그림 같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생각이 과거로 돌아가니 참 바쁘게도 살았던 서울생활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에 왜 그렇게 목숨 걸었었지?”

웃음이 난다.

“그래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 건 잘한 일이야. 후회는 없다.”

사실 서울생활도 나쁜 건 아니었다. 아니, 상당히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때도 행복했고 지금은 더 행복할 뿐.

“그나저나 이 커피 너무 비싸다. 한 잔에 육천 원… 아까비…”

근데 이게 웬 일? 먼데서 일기 시작한 천둥소리가 점점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

“에궁~ 큰일 났다. 고추 넣어놓았는데…”

나는 급하게 카페를 뛰쳐나왔다. 굽 높은 구두 때문에 뛰지도 못하고… 에구 발목 부러지겠다.

집에 도착하니 마치 하늘이 나를 놀린 듯이 날은 쨍 개고 만다.

“에고 다행이다.”

구두는 벗어서 상자에 담아 깊이 넣어두고 실크 투피스는 옷걸이에 걸어 다시 비닐을 씌운다.

츄리닝 바지에 고무신, 멋진 풀각시 패션으로 갈아입고 밭으로 나간다.

“아~ 편안하다~”

서울살이할 때 후배들이 직장문제로 상담할 때면 내가 항상 했던 말이 있었다.

“돈? 명예? 그런 거 따지지 말고 네 마음이 편안한 곳에 있어라.”

난 지금 마음이 한없이 편안한 흙 위에 서 있다.

 

박효신<br>
박효신 작가

*필자 박효신은 한국일보 기자, 여성신문 편집부장, 한국광고주협회 상무 등 35년 동안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2003년 충남 예산군 대흥으로 귀향해 2010년까지 7년 동안 농사만 짓다가 2011년부터 마을가꾸기 일을 주도해오고 있다. 그동안 여성신문에 '당신의 경쟁력 자신 있습니까?', '풀각시의 시골살이' 등의 칼럼을 연재해 책으로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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