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내 화면해설 작가 1호 서수연씨
더 킹·CSI·대장금 등 6000편 이상 작업
로스쿨·알고있지만 등 넷플릭스 인기작도
섬세한 해설에 비장애 시청자도 주목
“장애인·노인도 다같이 즐기는 콘텐츠 늘어야
후배들 위해 화면해설 체계화 힘쓸 것”

서수연 작가 ⓒ홍수형 기자
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여성신문과 만난 서수연 작가. ⓒ홍수형 기자

“(거기 선생님, 말 타신 분!) 이곤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태을이 코트 자락을 날리며 걸어온다. 쌍꺼풀 없는 큰 눈, 깨끗하고 흰 피부, 167cm의 키의 태을이 곱슬거리는 긴 머리를 밤바람에 휘날리며 자신에게 손짓한다. (...) 이곤은 시선을 떼지 못한다.”

2020년 방송된 SBS 드라마 ‘더 킹 : 영원의 군주’ 1화,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음성해설)의 한 대목. 소리 내 읽어보니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진다. 이렇게 인물의 외양과 행동, 미묘한 긴장, 분노, 두근거림도 목소리로 전하는 작업이 화면해설이다.

드라마 팬들이 좋아하는 감상법으로도 꼽힌다. 비장애인도 놓치기 쉬운 복잡한 시각 요소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풀이해서다. 온라인 드라마 시청자 커뮤니티엔 “화면해설로 보니 새롭고 재밌다” “연출의 단점을 보완해주니 이젠 해설 없이 못 보겠다” 등 호평이 많다.

‘국내 1호’ 화면해설 작가 서수연씨는 이 분야 20년 경력의 전문가다. ‘더 킹 : 영원의 군주’, ‘대장금’(MBC), ‘CSI : 과학수사대’(미국 CBS) 등 인기 드라마와 영화, 다큐, 뮤지컬, 연극까지 6000편 이상 해설했다. 올해부터는 넷플릭스와 계약을 맺고 드라마 ‘로스쿨’, ‘런온’, ‘알고있지만’(JTBC), 넷플릭스 오리지널 ‘마이 네임’ 등 화제작 해설을 맡았다.

그는 원래 방송국 구성작가였다. 2001년부터 시각장애인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다가 제안을 받고 2003년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화면해설에 처음 참여했다. 시각장애인들이 그가 쓴 화면해설을 듣고 ‘너무 재미있다’며 생생한 모니터링을 전할 때 뿌듯했다.

“화면해설이 시각장애인에게 단순히 정보와 재미만 주는 게 아니더라고요. 독립심, 자존감을 선사하는 중요한 기능을 해요. 옆 사람이나 가족에 의지해서만 드라마나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 혼자서도 원하는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됐으니까요.”

방송작가를 그만두고 화면해설에 매진하며 한동안 ‘월화수목금금금’을 살았다. 그땐 VCR(비디오카세트 레코더)로 방송을 녹화해 되감기, 정지, 재생 버튼을 번갈아 누르며 작업하느라 속도가 더뎠다. 빠르게 잘 쓰는 작가라고 소문이 나면서 작업 의뢰가 늘었다. 일주일에 7편씩 작업한 적도 있다. 방송국에선 다른 작가가 펑크를 낼 때마다 서 작가를 찾았다. 밥 먹다가도 달려가서 일했다. 

일에 익숙해지고 후배들이 하나둘 늘수록 화면해설 작업을 체계화할 필요를 느꼈다. 이론의 토대를 다지려고 기호학, 번역학도 공부했다. 이 분야 선진국인 영국에 2017년~2019년 유학을 다녀왔고, 지금 한국외대에서 영어번역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수년 안에 화면해설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게 목표다. 

“다음 세대도 저처럼 맨땅에 헤딩하면 안 되잖아요. 쉽게 체계적으로 배워야죠. 이론과 실기를 적절히 겸비한 인재가 늘수록 화면해설의 장래는 밝겠죠. 그 기틀을 마련하는 데 제가 기여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서수연 작가 ⓒ홍수형 기자
4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여성신문과 인터뷰 중인 서수연 작가. ⓒ홍수형 기자

서 작가는 자신이 해설할 작품을 받으면 우선 눈을 감고 쭉 들어본다. 잘 이해가 가지 않거나 의문이 드는 장면은 따로 메모했다가 더 세심하게 해설한다. 다양한 배경지식을 적극 활용하되,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한다. 해설은 너무 길어도 짧아도 안 된다. 화면과 딱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배경지식 쌓기, 글쓰기 연습도 중요하다. 드라마, 다큐, 음악 프로그램, 홈쇼핑 등 다양한 장르의 언어를 공부해두면 좋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차별적 단어 등 혐오 표현도 거를 줄 알아야 한다. 섬세하고 풍부한 어휘력도 강조했다. ‘더 킹’을 해설할 땐 소설책 더미를 쌓아 놓고 뒤져가며 더 나은 문장을 연구했다.

화면해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조언을 묻자 “이 일의 70%는 혼자 해야 한다. 엉덩이에 피가 날 정도로 오래 앉아 일할 수도, 잦은 밤샘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조언치곤 무섭다는 기자의 말에 웃으며 한술 더 떴다. “저는 혼자 일하다가 힘들어지면 카페에 갔어요. 입을 여는 순간이라곤 카페 직원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가 전부였지만요. 하하. 홀로 여유롭게 일하는 걸 좋아하는 분께 잘 맞을 거예요. 마감만 하면 되니까 원하는 곳에서 원격근무를 하는 ‘디지털 노마드족’으로 살 수도 있겠죠. 저는 어디서나 ‘붙박이장’처럼 일했지만요. 하하하!”

시각장애인만 화면해설 듣나요
노인·외국어 학습자 등 수요 늘어도
공급 부족...도쿄올림픽도 화면해설 안해
시각장애인도 즐길 수 있는
우리 무용·뮤지컬·연극도 하나둘 늘어

그는 화면해설 분야의 발전 가능성을 크게 점쳤다.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노안이나 건강이 좋지 않아 화면을 보기 힘든 사람들, 언어를 배우는 어린아이와 외국어 학습자, 새로운 방식으로 문화예술 콘텐츠를 감상하려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수요가 존재한다. 오디오북 시장이 커지며 사람들이 귀로 듣는 콘텐츠에 익숙해지는 것도 화면해설에 대한 거부감이나 생경함을 줄일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문제는 부족한 공급이다. 우리나라 방송사업자는 사업자 유형에 따라 화면해설방송을 5~10%씩 편성해야 한다. 그러나 주요 시청 시간대(오후 7~11시)에 나오는 화면해설방송은 드물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원하지도 않는다. 2020 도쿄올림픽 화면해설 방송은 없었다. 개막식 때 지상파 3사가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방송을 편성했을 뿐이다. 왓챠, 웨이브, 티빙 등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은 화면해설을 제공하지 않는다. 

미국, 영국 등은 OTT, 주문형비디오(VOD)의 장애인 방송 접근권을 법으로 명시하고 있다. 특히 영국은 영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웹, 모바일, 케이블, 위성 등 멀티 플랫폼 사업자가 화면해설방송을 제공하도록 의무화했다. 서 작가는 “우리나라 방송 제작자들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들의 요구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주최로 4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2021 무장애예술주간 프리뷰’ 웨비나에 참석한 서수연 작가가 ‘세상의 모든 공연과 전시물에 접근하다’를 주제로 문화예술 분야의 배리어프리 음성 언어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이세아 기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주최로 4일 서울 종로구 이음센터에서 열린 ‘2021 무장애예술주간 프리뷰’ 웨비나에 참석한 서수연 작가가 ‘세상의 모든 공연과 전시물에 접근하다’를 주제로 문화예술 분야의 배리어프리 음성 언어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이세아 기자

우리나라 무용, 뮤지컬, 연극도 시각장애인 등 다양한 관객에 맞춰 변하고 있다. 기획·연출 단계부터 이를 고민하고 실험하는 창작자들이 늘었다. 현대무용단 ‘고블린파티’는 최근 휠체어 무용수가 게스트로 참여한 작품에 음성해설을 도입한 댄스필름 ‘원’과 ‘옛날옛적에’를 선보였다. 구자혜 연출가는 2019년 남산예술센터에서 연극 ‘7번 국도’를 선보이며 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과 수어통역을 함께 제공했다. 서 작가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이 4일 연 ‘2021 무장애예술주간 프리뷰’ 행사에 참석해 이러한 동향을 설명하고 토론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뜻 있는 창작자들, 문화예술 관계자들이 모여서 함께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려 노력하고 있어요. 이런 변화의 물결이 더 커지길 바라요.”

서수연 작가는

- 2003년 4월 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첫 화면해설 대본 작성

- 2003년 ~ 현재 : <대장금>, <불멸의 이순신>, <CSI 과학수사대 전 시리즈>, <더킹: 영원의 군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 (KBS, MBC, SBS, EBS, JTBC, OBS, tvN, MBN, Channel A, Mnet, Netflix) 총 6000편 이상 작성

- 2005년~2014년 국내 최초 KBS 제 3라디오 화면해설 전문프로그램 진행 <우리는 한 가족>, <일요문화센터 생생 TV>, <라디오 여행기>

- 2003년 첫 화면해설 연극 <트랜스 십이야>

- 2009년 첫 화면해설 뮤지컬 <영웅을 기다리며>

- 2011년 제1회 배리어프리영화제 영화 <블라인드> 화면해설 대본

- 2011년 문화관광부 첫 그림동화책 해설 <팥죽 할멈과 호랑이 이야기>외

- 2012년 CGV ‘한글자막&화면해설’ 최초 극장 상영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 대본

- 2012년 제1회 스탠다드차타드은행 ‘착한 도서관 프로젝트’ <소도시 여행의 로망> 사진 해설

- 2019년~ 현재 배리어프리영화제 <김복동>, <빛나는> <파리로 가는 길> 화면해설 대본

- 2017년 영국 런던시티대학교 영상번역 디플로마

- 2019년 영국 뉴캐슬대학교 미디어와 저널리즘 석사과정

- 2020년~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번역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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