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궁 3관왕 안산 선수가 지난 1일 2020 도쿄올림픽을 일정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양궁 3관왕 안산 선수가 지난 1일 2020 도쿄올림픽을 일정을 마치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페미니스트 아닌가?"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 안산 선수를 향해 남초 커뮤니티들에서 쏟아진 질문들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대에 숏컷, 페미니스트 조건을 모두 갖췄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여명숙 같은 사람들은 안산이 과거 인스타그램에 '웅앵웅', '오조오억' 같은 남성혐오 용어들을 사용했다며, "안산은 답만 하면 된다. 페미인지 아닌지 한마디만 하면 된다"고 요구했다. 그냥 길 가던 사람 붙잡고 너 페미냐 아니냐 대답하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금메달 리스트도 이런 곤욕을 치르니, 직장 상사, 면접관, 선후배, 남친들로부터 수시로 너 페미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 보통 여성들을 오죽할까 싶다.

너 페미 아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여성혐오이다. 그 질문에는 페미를 불편하고 거북한 존재로 여기는 불온한 시선이 전제되어 있다. 혹시 나에게 불편한 페미는 아닌지 확인하고, 페미 아님을 대답받아 안도하는 양자택일의 이분법인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예스(Yes)냐 노(No)냐는 선택을 강요받아야 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각자의 경험에 따라 서로 다른 결의 수많은 페미니즘들이 존재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피아를 칼로 베듯이 가르는 어떤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거나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은 개인들의 생각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통째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예스냐 노냐를 답하라는 것은, 세상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가르려는 것 만큼이나 폭력적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로 답변하지 않을 권리를 말한 바 있다. 그에게 답변하지 않을 권리란 어떤 정체성을 갖지 않을 권리, 나에게 강요되는 정체성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끊임없이 개인의 정체성을 묻고 그에 대한 고백을 들으려 하는 사회의 집착증 앞에서 데리다는 그같은 강요를 거부할 권리를 말한 것이다. “너 페미 아니냐?’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할 권리를 우리는 갖고 있다. 페미든 반페미든 마찬가지이다.

서울 종로의 한 골목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아내 김건희 씨를 비방하는 내용의 벽화. ⓒ뉴시스‧여성신문
서울 종로의 한 골목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아내 김건희 씨를 비방하는 내용의 벽화. ⓒ뉴시스‧여성신문

바야흐로 대선정국이다. 유권자들의 절반인 여성들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희망적인 얘기들이 들려올 법도 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뒷걸음질 치는 것 같은 광경들이 이어진다. 야권의 대선 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 씨를 겨냥한 쥴리시리즈는 최악의 여성혐오 정치를 보여주었다. 터무니 없는 소문을 갖고 치매 모친인터뷰를 하는가 하면 쥴리 벽화까지 만들어내는 행위의 바탕에는 철저히 반인권적이고 반여성적인 사고가 깔려있다. 그럼에도 자기 지지자들의 몹쓸 행위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은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그런 일들을 엄정하게 비판하고 제대로 된 젠더 정치를 해나가야 할 야당에서도 젠더 갈등만 부추기며 편승하려는 언행들이 이어진다. 양준우 국민의힘 대변인은 안산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 '남혐 용어 사용'에 있고, 레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에 있다고 엉뚱한 주장을 꺼내 진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윤석열 전 총장은 페미니즘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 남녀 간의 건전한 교제도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얘기도 있다며 페미니즘을 저출산 문제의 원인처럼 말했다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준석 대표 같은 사람은 이제는 남성이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정도인가 하는 탄식이 나온다.

이런 글을 쓰는 내게도 페미니즘은 여전히 어려운 영역이다. 페미니즘을 더 알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 최승범 선생의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책을 폈더니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지역의 여성 정당인을 밤늦게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무심코 아이는 지금 누가 봐주는지를 물은 것이다. 아차, 실수했다 싶었다. 여태껏 숱한 남성들을 늦은 밤에 만나왔지만 그들에게는 한 번도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 오랫동안 공부하고 성찰했으니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거라 여겼는데 오만한 생각이었다. 30년 넘게 한국 남자로 자라며 공기처럼 마신 여성혐오는 사고의 기저에 뿌리박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여성혐오의 사고에 둘러싸인 사회에서 수십년 살아온 남성이라면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얘기를 함께 나눠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많음을 알게 해주는 무더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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