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간 ‘정액 테러’ 판결문 32건
경찰 접수 사건 44건 살펴보니
피해자 몸 안 만졌으니
폭행·협박 없었으니 성범죄 아니다?
경찰·재판부마다 범죄 혐의·형량 들쭉날쭉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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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달간 대학원 동료의 커피, 틴트 등에 자신의 정액과 가래 등을 몰래 넣은 남성, 직장 동료의 텀블러에 수차례 정액을 넣은 남성, 이웃 앞으로 온 택배 물품에 정액을 묻힌 남성... 모두 재물손괴죄로만 처벌받았다. 피해 여성의 물건을 망가뜨린 죄가 인정됐을 뿐, 성범죄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남의 빌라에 침입해 여성 속옷을 훔치고, 정액을 묻혀 걸어둔 남성은? 절도죄로만 처벌받았다. 이렇게 명백한 성적 의도를 갖고 정액테러를 저질러도, ‘직접적 신체접촉’이나 폭행·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성범죄 처벌을 피한 사례가 적지 않다. 

많은 피해자들이 고소는커녕 신고조차 망설이는 이유다. 정액 테러범이 엄중한 처벌을 받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다. 지난 3년간 경찰이 접수한 정액 테러 사건의 38.64%(17건)는 성범죄 대신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됐다. 이 중 13건(76.46%)만 기소됐다. 3년간 정액 테러 사건 판결 32건 중 5건엔 성범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형량도 재판부마다 들쭉날쭉했다.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누구는 벌금형을, 누구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몸에 안 닿았으니, 폭행·협박 없었으니 성범죄 아니다?
경찰·재판부마다 범죄 혐의·형량 들쭉날쭉

여성신문은 최근 3년간 경찰이 접수한 ‘정액 테러’ 사건 44건과 판결문 32건을 분석했다. 비슷한 범행도 담당 경찰서, 재판부에 따라 다른 혐의가 적용됐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얘기다.

올해 3월2일 서울 지하철에서 피해자의 코트 주머니에 자신의 정액이 담긴 콘돔을 넣은 남성은 강제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같은 달 23일 서울 지하철역에서 자신의 정액이 담긴 콘돔을 피해자의 가방에 넣은 남성은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2018년 8월7일 대낮에 경기도 안양시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피해자를 뒤따라가 물약통에 넣은 정액을 피해자 치마에 뿌린 남성은? 강제추행죄로 1심에서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달 29일, 서울 영등포구 오피스텔 옆집 피해자의 택배물품(치마)을 열어 보고, 자위행위 후 정액을 묻힌 남성은? 재물손괴죄로 벌금 50만원만 선고받았다.

여성 동료의 텀블러에 자신의 정액을 수차례 넣은 남성 공무원은 ‘피해자 소유 텀블러의 효용을 떨어뜨린 죄(재물손괴죄)’로만 처벌받았다. 2020년 1월 서울 강북구 사무실에서 피해자가 책상 위에 둔 텀블러를 화장실로 가져가 자신의 정액을 넣었다. 그해 7월까지 6차례에 걸쳐 범행했다. 그러나 성범죄가 적용되지 않아 벌금 300만원에 그쳤다.

2019년 1월31일 경기도 고양시 직장 내 직원 탈의실에서 여성 직원의 옷을 발견하고 자위행위 후 정액을 묻힌 남성도 재물손괴죄로 처벌받았다. 단 벌금형이 아닌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80시간 등을 선고받았다. 이전에 불법촬영 등 성범죄로 벌금형을 받은 적이 2번 있었고,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 고백을 거절한 대학원 동료의 커피에 정액, 침, 최음제, 변비약을 몰래 타는 등 악행을 일삼은 남성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절도, 폭행, 상해미수, 재물손괴·은닉, 방실침입 혐의가 인정돼 징역 4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성범죄로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남성은 연구실에서 피해자가 자는 모습 등을 보며 자위하고, 몰래 훔친 피해자의 사진이나 속옷 등을 이용해 자위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온 정액을 수십 회에 걸쳐 피해자의 음료나 소지품에 몰래 넣었다. 재판부는 “실질적으로는 오랫동안 피해자에 대해 성적 가해행위를 한 것”이며, “아무런 이유나 잘못도 없는 피해자에게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범행을 오랫동안 저질러 마땅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꾸짖었다. 그러면서도 가해자가 “범행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하며, 범죄 전력이 없고, 친지들이 탄원하는 점” 등을 참작했다.

아예 성범죄로 처벌되지 않은 사례도 있다. 빌라 출입문이 열린 틈을 타 침입해 피해자 집 앞 빨래건조대에 널린 팬티나 레깅스를 훔치거나, 훔친 팬티에 자신의 정액을 묻혀 다시 널어놓은 남성이다. 2019년 6월3일부터 10월1일까지 총 16회 범행을 저질렀다. 절도미수, 절도 등 동종범죄 7차례 처벌 전력도 있다. 성범죄가 아닌 야간주거침입절도, 절도, 주거침입 혐의만 인정됐다.

강제추행 혐의가 인정됐지만, 항소심에서 감형된 사례도 있다. 자기 정액을 딱풀 뚜껑에 담아서 갖고 다니던 한 남성 종교인은 2019년 8월7일 서울 전철역 1출구 앞에서 정액을 피해자의 머리카락, 치마에 묻힌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 불과 1년 전 비슷한 범행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도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1심에서 강제추행 혐의가 인정돼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가해자 측은 “피해자와 신체적 접촉이 없었고,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 강제추행이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1심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한 뒤 추행하는 행위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가 아니어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었다면 강제추행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피고가 범행을 시인하며 뉘우치고 있고, 피고의 가족들이 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는 등의 이유로 징역 8월로 감형했다.

미국 미네소타주는 정액 테러 ‘성범죄’로 처벌
우리 국회도 입법 나서

정액 테러를 엄벌하려면 공정하고 합리적인 양형 기준부터 마련할 필요가 높다. 해외 사례도 참조할 만하다. 미국 미네소타주는 정액이 피해자의 신체나 옷에 묻을 경우,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으로 인정해 성범죄를 적용하고 있다.

국회에서도 입법에 나섰다. 백혜련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기 또는 다른 사람의 성적 욕망을 유발하거나 만족시킬 목적으로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물건을 상대방에게 도달하게 한 사람을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성폭력특별법 개정안을 7월 대표발의했다.

백 의원은 “‘정액 테러’는 대부분 피해자와 가해자가 일면식이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누구나 피해 대상이 될 수 있고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성범죄다. 직접적 신체접촉이 없더라도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면 ‘성범죄’로 처벌해야 하나, 전형적 성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치는 등 처벌 수위가 매우 낮다.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확대 전환돼 피해자 보호를 좀 더 두텁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정숙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실장은 “정액이 소지품에 묻었다고 재물손괴죄를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하다고 본다. 피해자에겐 원하지 않는 성적 접촉이고, 가해자 측면에서는 의도적이고 강제성이 있는 성적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봐야 한다. 강제추행죄를 포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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