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간 ‘정액 테러’ 판결문 32건 살펴보니
신체 접촉·폭행·협박 없는 정액테러도
현행법상 ‘강제추행’의 정의 폭넓게 해석해
합리적 판결 내린 사례 늘어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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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액 테러범 : “호기심에 그랬어요. 신체 접촉, 폭행이나 협박도 없었고요. 성범죄 아닙니다.”

법원 : “성범죄 맞습니다. 피해자가 원치 않는 행위를 통해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켰으니, 그런 게 없어도 강제추행죄가 성립됩니다.”

가해자들의 항변에도 몇몇 재판부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현행법상 ‘강제추행’의 정의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도, ‘정액테러’는 성범죄가 맞다고 봤다.

형법 제298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해 추행”한 행위를 강제추행으로 규정한다.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만을 인정한다. 실제론 이렇게 좁은 기준만 적용되지는 않는다. 전후 맥락을 종합해 합리적인 판결을 내린 사례가 늘었고, 그러한 판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여성신문이 최근 3년(2019~2021년 6월)간 ‘정액 테러’ 판결문 32건을 분석한 결과다.

울산지법 2020.12.11 선고 2020노822 판결문 발췌 내용. ⓒ여성신문
울산지법 2020.12.11 선고 2020노822 판결문 발췌 내용. ⓒ여성신문

2019년 9월15일, 울산 시내에서 통화 중이던 피해자를 몰래 뒤따라가 자위행위를 하고 피해자의 등허리 부분에 사정한 남성은 1심에서 강제추행죄로 처벌받았다. 범인은 “고의도, 신체 접촉도, 폭행이나 추행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제추행죄는 폭행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는 ‘기습추행’도 포함된다. 반드시 상대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가 아니더라도,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기만 하면 기습추행이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또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고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행위는 신체 접촉이 없어도 추행 행위이며, 강제추행 및 추행의 고의가 성립한다”고 못박았다.

한 남성은 2018년 8월7일 대낮에 경기도 안양시 한 초등학교 정문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피해자를 뒤따라가 물약통에 넣어둔 정액을 뿌렸다. 그리고 강제추행죄로 1심에서 징역 4월에 집유 1년을 선고받았다.

이 남성은 “성욕을 채울 목적이 아닌 단순한 호기심과 장난에 한 일이고, 개방된 공간에서 정액을 뿌리자마자 도망쳤다”며 성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피고의 범행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행위로서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추행죄에서의 추행에 해당”한다고 못박았다.

자기 정액을 딱풀 뚜껑에 담아 다니던 남성 종교인은 2019년 8월7일 서울 지하철역 부근에서 피해자의 머리카락과 치마에 정액을 뿌렸다가 강제추행죄로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 불과 1년 전 비슷한 범행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도 저지른 범죄다.

이 남성은 “피해자와 신체적 접촉이 없었고,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 강제추행이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1심 재판부는 이렇게 물리쳤다.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해 항거를 곤란하게 한 뒤 추행하는 행위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가 아니어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었다면 강제추행죄에 해당한다.” 다만 2심 재판부는 “피고가 범행을 시인하며 뉘우치고 있고, 피고의 가족들이 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한 일 등을 참작해 징역 8월로 감형했다.

우연히 마주친 피해자가 마음에 들어 주거지를 알아내고, 2018년 7월13일 몰래 침입해 잠든 피해자 옆에서 자위행위를 하고 침대보와 피해자의 발목에 정액을 묻힌 남성은 1심에서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준강제추행죄로 처벌받았다. 이 남성은 “피해자의 몸에 정액이 직접 닿지 않았으니 추행이 아니다”라고 우겼지만, 재판부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20만원 등을 선고했다.

인터넷에서 읽은 글을 토대로 모방 범죄를 계획, 2018년 11월19일 경기도 부천시 버스정류장 앞에서 미리 화장품병에 넣어둔 자기 정액을 처음 보는 여성의 머리와 코트에 뿌린 남성도 강제추행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모든 정액 테러 범죄가 이러한 처벌로 귀결되진 않는다. 여성신문이 최근 3년간 경찰이 접수한 ‘정액 테러’ 사건 44건과 판결문 32건을 분석했더니 비슷한 범행도 담당 경찰서, 재판부에 따라 다른 혐의가 적용됐다.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얘기다. 지난 3년간 경찰이 접수한 정액 테러 사건의 38.64%(17건)는 성범죄 대신 재물손괴 혐의가 적용됐다. 3년간 정액 테러 사건 판결 32건 중 5건엔 성범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형량도 재판부마다 들쭉날쭉했다.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누구는 벌금형을, 누구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형적이지 않은 성범죄가 늘고 있는 만큼, 성범죄에 대한 폭넓은 법적 인정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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