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 여성학자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번째 이유는 단순명백하다. 밥을 안 해도 된다는 거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밥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라니 이유치고 너무 치졸하다고 흉보지 마시라. 30년 이상 줄기차게 밥해 본 여자들은 다 안다.

두 번째는 좀 고상하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평소 나의 행동반경 안에서는 도저히 마주칠 수 없는 사람들과 몇 날 며칠을 함께 지내는 게 참 재미있다. 그래서 난 패키지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반면 내 남편은 패키지 여행을 꺼린다. 불특정 다수가 모인 자리엔 꼭 끼게 마련인 대책 없는 사람들 때문이다. 일행이 몇 명이건 간에 시끄럽고 무례하고 잘난 척하는 이들이 반드시 빠지지 않는 건 정말 웬 조화일까. 아마 이것도 무슨무슨 법칙 중 하나인가 보다. 내가 '까다로비'라는 별명을 붙인 남편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여행 내내 심기가 불편하기 일쑤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 보는 것도 재미있다. 오죽 자랑할 데가 없으면, 아니 오죽 콤플렉스가 크면, 생판 보지도 못한 사람들한테 자기 잘사는 거, 자기 잘난 거를 떠들어대고 싶을까 안쓰러운 마음이 보기 싫은 마음보다 훨씬 크다. 아무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특수하다는 내 평소 생각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때가 여행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네 주위의 인간들이 다 특수해서 그렇지 대부분은 평범하다고 우기는데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특수한 걸 보면 내 말이 맞다. 소위 '보통사람'이라고 공언했던 전직 대통령을 봐도 그렇잖아.

여행은 사람 만나는 재미

아니,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려다 이렇게 서두가 길어졌지? 아, 참, 지난 번 일본여행에서 만난 어떤 여성이 계속 머릿속에서 왔다갔다한다는 말을 하려던 거였군.

작년에 남편이 회갑을 맞았다. 인생 80시대인 요즘 누가 회갑을 챙기냐고 어물쩡 넘어가려는데 아이들이 효도관광을 시켜 주겠단다. (아이들은 부모가 잘 안해 줄수록 효자가 된다더니!) 쑥스럽기도 하고 바쁘기도 해서 차일피일했더니 아이들 말이 해를 넘기면 무효로 하겠다나. 아이구 아까워라 싶어 어거지로 짬을 내서 닷새 동안의 일본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양한 연령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31명의 일행이 한결같이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너무 예의바르고 조용해서 당신들, 한국 사람 맞아?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젠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구나 하고 감격하는 순간, 식당의 옆 테이블에 시끌벅쩍 다른 한국인 그룹이 도착했다. 그러니까 우리 일행은 한국인치고 정말 특수한 사람들의 집합체였던 거다.

31명 중에 혼자 온 사람이 셋이었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셋 다 멋있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이는 63세의 미국동포였다. 나이를 어떻게 알았냐고? 그이 스스로 계속 자기 나이를 말했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를 할 때마다 그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63세가 되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요, 라고.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깊은 이야기를 안 하는 게 관례인데, 마지막날 아침을 먹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의 63년 인생을 쫙 풀어 놓았다. 열여덟에 영어교사로 온 미국청년과 사랑에 빠져 열아홉에 미국으로 건너가 자식 셋을 낳아 길렀다고 했다. 그 새 친정동생들을 불러 모두 의사 변호사를 만들었단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니 잘못 산 거 같아요. 여기 오신 다른 분들 보니까 다들 잘 사신 것 같은데.”

짙은 회한이 묻어 나오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난 가슴이 꽉 막혀 왔다. 혼자 여행을 떠나 낯선 사람에게 속마음을 드러내기까지 그가 겪었을 혼란은 과연 어느 만큼일까.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누구나 다 자기만 잘못 산 거 같이 생각하잖아요. 말씀 듣고 보니 어머닌(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잘 사신 거예요. 정말 대단하세요.”

난 갑자기 확신범 같은 말투로 진심을 다 실어 그를 격려했다. (나도 나만 잘못 산 것 같은 생각 때문에 우울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사람, 그것도 같은 또래의 여자에게서 듣는 위로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나 보았다. 닷새 내내 심난하던 그의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그런가요?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여행은 이래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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