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자 작, ‘2010-4 청보리이랑 1’ (130.3x97cm, 순지5배접+암채, 2010) ⓒ이숙자
이숙자 작 ‘2010-4 청보리이랑 1’ (130.3x97cm, 순지5배접+암채, 2010) ⓒ이숙자

<작가의 말>

1970년대 후반 나는 경기도 포천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나지막한 언덕 등성이에 넓게 펼쳐진 보리밭을 보고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다. 쏟아지는 태양 아래로 펼쳐진 그 보리밭에서 소름 끼치도록 요기스런 초록빛 공기가 감도는 듯한 어떤 적막감 같은 것을 느꼈다.

9살 어린 시절 아버지 고향인 충북 옥천으로 피난 가서 보리밭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놀았던 그 보리밭을,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세월을 거슬러 되돌아간 듯한 환영에 사로잡혔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보리밭이 자연의 서정이나 꿈· 낭만 뿐만이 아닌, 알 수 없는 슬픔의 빛깔마저 띄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그 보리밭이 더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보리밭의 요기스런 초록빛엔 가난하고 아팠던 우리 조상들의 혼백이 떠도는 듯했다. 그러나 가파른 보릿고개의 너머엔 양식이 여물어가는 희망이 있었다. 유년기의 추억을 간직한 보리밭은 한국적인 서정이 깃들어 있는 작품소재이고, 또한 질긴 생명력으로, 아름답고 슬프고도 강인한 우리 민족성을 상징한다. 이런 보리밭은 한국적 정서뿐만 아니라 그 보리밭을 그리는 일은 내 작업 스타일과 잘 맞아 떨어졌다.

무한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보리알 한 톨 한 톨을 원시적으로 박아야 하고, 잘 영근 보리이삭의 실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 암채를 여러 번 겹쳐 칠해 보리 알갱이의 입체감을 살리다 보니 보리알의 두께가 생겨 부조기법도 개발할 수 있었다. 또한 틀림없이 수염을 한 줄씩 한 줄씩 그려야 하고, 실같은 선이 수 만개가 어우려져야 풀빛 안개같은 아련한 보리밭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다.

이처럼 보리밭을 그리는 일은 도를 닦는 일이나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세월에 비례할 만큼 책임 있는 작품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가슴 속에 단단한 실타래가 감겨 덩어리져 가는 듯 답답해져 갔다. 그러나 보리알을 그리기 위해 보리알을 한 알씩 박고 수염을 한 줄씩 그리면서 나는 가슴속에 맺혀있던 중압감으로 해서 생긴 응어리가 보리알 한 알만큼씩, 수염 한 줄 한 줄만큼씩 풀려 나가서 기도할 때처럼 편안함 속에 잠길 수 있었다.

이러한 가슴이 아린 듯한 아름다움이 있고 조상의 혼백이 떠도는 듯한 애틋함과 한편 강인한 민족성과 희망의 상징인 그러한 보리밭을 그리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마음의 고향에 대한 향수를 찾아 지금까지 보리밭을 그려 왔다.

이숙자 작 ‘2013-1 이브-봄의 환상’ (162.0+130.3cm, 순지5배접+암채, 2013) ⓒ이숙자
이숙자 작 ‘2013-1 이브-봄의 환상’ (162.0x130.3cm, 순지5배접+암채, 2013) ⓒ이숙자

 

<작가 약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3~ 2007 고려대학교 조형학부 교수(정년퇴임)

 

<개인전>

1973~현재 선화랑, 진화랑, 프랑스 파리 에바라츠갤러리, 고양 아람누리미술관 기획초대전, 가나아트센터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초대전 등 26

 

<단체전>

1986~2005 서울미술대전 초대 (서울시립미술관 외)

1995~2002 아시아 평화미술전 (일본 동경 오사카, 나고야 등)

2005 SALON 2005 SNBA (CARROUSEL DU LOUVRE, PARIS FRANCE)

2007 .북 대표작가 2인전 - 선우영.이숙자 전

2016 백두산을 그리다 (이천시립월전미술관)

2020 한국 근현대 인물화 (갤러리현대)

 

<수상>

1980 29회 국전 대상 수상, 3회 중앙미술대전 대상(중앙일보)

1994 5회 석주미술상

2011 5회 대한민국 미술인상 여성작가상(한국미술협회)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호암미술관, 고려대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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