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난간에 서서 온 몸에 휘감아오는 산고를 견뎌내고 있었다.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저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것 외에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었던 그녀는 생사를 넘나들 만큼 지독한 고통을 그저 참고 견뎌냈을 것이다. 임신을 하고 10개월 내내 아이를 몸에 품고 사는 동안 늘 불안했을 그녀는 찢어진 가랑이를 감추지도 못하고 탯줄도 끊어내지 못한 아이를 복도에 홀로 남겨두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리고 무서웠겠지.

얼마 전 아파트 복도 한켠에서 죽어간 신생아가 있었다. 탯줄도 끊어지지 않은 채 세상에 잠시 머물다 돌아간 그 아이의 죽음 앞에서 많은 이들이 분노했고, 잠시나마 그 아이의 어미였던 그녀에게 쉼 없는 질타를 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아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아살인의 죄목으로 구속 수감되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어 그 험한 출산의 고통을 입 한번 뻥긋 못 하고 참아냈고, 아픈 제 몸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아이를 몸에서 떼놓는 일이 우선이었을 만큼 불안해했던 그녀의 죄목은 사실 '처녀가 임신한 것'이다. 치명적인 도덕성의 결함으로 인한 사람들의 질타를 참아내기 두려웠을 그녀는 몸 속에서 자라는 아이를 행복하게 맞이할 겨를도 없이 그 아이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도 살고 싶었겠지.

내 아랫도리가 저릿해지는 느낌이었다. 수갑을 찬 그녀의 손목이 부끄러웠다. 우리가 그녀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았나. 우리가 그녀를 절벽으로 밀어넣지 않았나. 우리가 그녀에게 자유로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돌아보자. 그녀는 용감하게 사랑을 선택했고, 출산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을 지원해줄 사회적 시스템은 전무하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겠다고 바둥대는 여성들에게 우리는 어떠한가. 아이 아빠는 누구냐 추궁하거나 혼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느냐 혀를 차며 무책임하게 돌아서지 않나. 나이도 어린것이 남자 밝혔다고 욕지거리를 하고 손가락질하지 않았나.

이제는 우리 사회도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가져도 자유롭고 안정되게 임신과 출산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하는 절대적인 조건이 결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성의 성적 자유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고, 또한 결혼이 하나의 선택이듯 성적 결정권과 함께 아이를 낳을 것인지 혹은 낳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역시 사회가 인정한 조건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선택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고 싶다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아이를 진정 원하는지, 그래서 아이와 행복한 삶을 꾸릴 준비가 되어있는지의 여부일 것이다.

우리 나라가 저출산에 고민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야 할 여성들에게 부당한 사회이니 당연하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인 여성이 스스로의 선택에 당당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저출산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제발 멀쩡한 사람 죄인 만들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을 기대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복도에서 죽은 그 아이의 애비는 어디 있는가?

조유성원/ 한양대 문화인류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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