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appl@hanmail.net 사회복지사, 어르신사랑연구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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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한가운데 자리잡은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는, 흰 몸에 주먹으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이 눈 주위에 검은 얼룩점이 있는 개의 얼굴이 들어 있다. 거기다가 뾰족한 귀 옆에는 합성해서 붙인 커다란 사슴뿔이 양쪽으로 나뭇가지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포스터 아랫부분에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개가 나란히 앉아 사슴뿔을 달고 있는 개를 부러운 듯 올려다본다.

버스도 통 올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개 한 마리 길러 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기를 수 없는 사정 탓에 문방구에 가면 공책이든 수첩이든 무조건 강아지 그림이 들어 있는 것만 고르는 아이들 생각도 나서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들여다봤다. '애견은 가족입니다!' '원산지 뉴질랜드!' '녹용과 녹혈로 만든 애견의 보약!' '애견과 함께 듣는 음악CD 무료 증정!'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늘 개가 있었고 나 역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개를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포스터 글귀를 읽는 순간의 내 감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허걱!”이었다.

흔히 노년기의 네 가지 어려움(四苦)으로 가난, 질병, 고독과 소외, 역할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질병과 함께 노인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노년계층이 다른 성인 연령층에 비해 훨씬 가난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다는 것은 굳이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지금의 노년층은 자식이 재산이라고 생각했던 분들로 자식이 바로 노후보험이었던 세대다. 그랬기에 아무 망설임 없이 자식의 양육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할 수 있었고, 노후준비를 따로 할 필요 없이 가진 재산 모두를 자녀 교육비에 쏟아 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경제적 준비 없이 노년에 이르고 보니 결국 가정과 사회에서 '역할 없는 역할(Roleless Role)'을 하며 들러리 혹은 주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 심심찮게 소개하는 쪽방에 살고 계신 어르신, 앞에 놓인 바구니에 동전이 모여 쌓이기를 기다리며 길모퉁이 찬 바닥에 하염없이 앉아 계신 어르신, 지하철에서 누군가 껌 값을 내밀기를 바라고 바라시는 어르신, 낡은 유모차에 넘치도록 폐지를 모아 싣고 가시는 어르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힘들고 어려운 분들의 노년이 결코 젊은 시절의 방탕이나 무능함의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대를 물려 이어지는 구조적인 가난이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노후대책을 생각하기는커녕 자식들 굶기지 않고 공부시키기에 급급해 앞만 보고 달려오신 분들의 굽은 어깨와 휘어진 허리, 주름진 얼굴에 담긴 아픔은 그 누구라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나누어져야 할 짐이다. 솔직히 나는 애견 보약을 선전하는 포스터를 보며 흔히들 말하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꼈다. 사람이 기르는 개도 수입 보약을 먹는 시대인데 버스 정류장 그 포스터 앞에서는 얼굴이 새카맣고 평생의 노동으로 손마디 뼈가 퉁그러져 나온 할머니 한 분이 마른 잡곡 몇 봉지를 팔아볼까 펼쳐놓느라 분주하다.

노년준비가 영 신통치 못한 중년의 나는 녹용을 먹는 팔자 좋은 개와 마지막 남은 삶까지 가난에 붙들려 있는 주름진 할머니 사이에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고, 그때까지도 내가 탈 버스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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