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이의 마음대로 책읽기] 이야기는 힘이 세다
[박선이의 마음대로 책읽기] 이야기는 힘이 세다
  • 박선이 기자
  • 승인 2021.07.31 09:33
  • 수정 2021-07-31 2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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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귀신이 되다』
『시대가 그려낸 소녀-한일 순정만화의 역사』
『한국 베스트셀러 여성작가의 러브스토리 코드: 김말봉, 장덕조, 박계형 소설의 미학』

이야기는 힘이 세다. 끔찍한 비극도 기막힌 희극도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을 때 독자들에게, 청자들에게 훨씬 강렬하게 스며든다.

귀신 이야기, 공주 이야기, 계모 이야기, 비련 이야기 등 우리 주변에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퍼져 있는 이야기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험적 실제 뿐 아니라 원망, 소망이 담긴 허구이면서 미래를 향한 설계도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성일 때,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온 사회적 질서와 규범을 향해 한층 복합적이고 저항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 많다. ‘자연스러운’ 일이 실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남성 우위의 가부장체제가 빚어낸 현상이기 때문이다. 전승설화나 소설, 만화 같은 ‘이야기’에서 여성의 언어와 여성의 의미를 찾아내는 노력은 그래서 값지다. 

『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현암사 펴냄
『여성, 귀신이 되다』 전혜진 지음·현암사 펴냄

소설가 전혜진의 『여성, 귀신이 되다』(현암사)와 만화연구자 김소원의 『시대가 그려낸 소녀-한일 순정만화의 역사』(소명출판) 국문학자 진선영의 『한국 베스트셀러 여성작가의 러브스토리 코드: 김말봉, 장덕조, 박계형 소설의 미학』(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은 오랜 기간 동안 이야기 연구의 지적 전통에서 뒷줄에 밀려나 있던 미디어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억울한 귀신 이야기에 왜 특히 여자 귀신이 많을까? 커다란 눈망울의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에는 왜 순정만화, 소녀만화라는 ‘2급’ 딱지가 붙어야 했을까? ‘문학’ 취급을 받기도 어려웠던 대중 소설, 그 중에서도 여성의 자유로운 애정 감정을 표현한 ‘연애소설’은 왜 3류 취급을 받았을까? 이 세권의 책이 비슷한 시기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출간된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성, 귀신이 되다』는 우리 전승 설화에 나오는 여성 귀신들에 주목한다. 저자는 야담집, 옛소설, 구비문학에 나오는 여성 귀신이야기 78편을 찾아내 이들의 목소리를 밝혀낸다. 누명을 쓰고 자결한 딸들, 딸을 열녀로 만들어 출세하려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과부 딸, 병자호란 때 희생당한 부인들, 그리고 이 ‘원통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살려내는 무당들이다.

여자 귀신들은 가슴에 칼이 꽂혀 유혈이 낭자하고 신체가 토막 난 채로 한 밤중 원님에게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한다. 살아서는 말할 수 없던 잔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시간이다. 심약한 사또는 이들의 출현에 놀라서 목숨을 잃지만,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또는 이들의 원한을 풀고 죄악을 햇빛아래 드러낸다. 이런 죽음이 ‘안채도 규방도 안식처가 될 수 없었’던 과거에만 있겠는가. 지금도 여성을 상대로 한 수많은 범죄가 감춰진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죽음은 21세기의 새로운 설화가 되고 있다. 사법체계가 ‘여성 귀신’의 원을 풀어줄 수 있는 젠더적 감수성과 지혜를 장착해야할 이유다.

『시대가 그려낸 소녀-한일 순정만화의 역사』 김소원 지음·소명출판 펴냄
『시대가 그려낸 소녀-한일 순정만화의 역사』 김소원 지음·소명출판 펴냄

『시대가 그려낸 소녀-한일 순정만화의 역사』는 만화연구자이기 이전에 만화 애독자였던 저자가 두 나라의 순정/소녀 만화에 나타난 이야기에 주목한다. 한국에서 순정/소녀 만화는 1960년대 슬프고 가난한 소녀에서 1970년대 명랑하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변화했으며 1980년대 황금기를 이뤘다. 1988년 창간한 ‘순정만화 전문’ 잡지 ‘르네상스’는 김동화 황미나 김혜린 신일숙 한승원 김진 이진주 이은혜 등 인기 만화가들이 로맨스, 역사, SF 소재를 다양하게 구사하며 ‘여성들의 이야기’ 폭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일본 ‘소녀만화’의 영향에서 시작된 한국의 순정만화는 희생하는 여성이라는 전통적 성격을 넘어 강인하고 승리하는 인물(김혜린 ‘북해의별’), 전사(신일숙 ‘아르미안의 네 딸들’ 강경옥 ‘별빛속에)로 발전한다. 종이 만화에서 웹툰으로 미디어가 변화하면서 순정만화의 사실상 끝나고, 좀더 복잡한 사회관계와 문제들이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로맨스 웹툰이 등장했다. 로맨스웹툰에서 여성은 더 이상 ’순정‘하지 않고, 젠더 이슈도 다양하게 전개된다. 여성 이야기가 어떻게 발전할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한국 베스트셀러 여성작가의 러브스토리 코드: 김말봉, 장덕조, 박계형 소설의 미학』 진선영 지음·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한국 베스트셀러 여성작가의 러브스토리 코드: 김말봉, 장덕조, 박계형 소설의 미학』 진선영 지음·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한국 베스트셀러 여성작가의 러브스토리 코드: 김말봉, 장덕조, 박계형 소설의 미학』은 지금의 젊은 독자들에게는 거의 ‘잊혀진’ 여성 작가에 주목한다. 이들의 소설은 일제 치하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동 속에서 자기 욕망을 드러내려했던 ‘러브스토리’를 통해 당대 여성의 삶을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전성기에 ‘통속 연애소설’로 비난 받았다는 점이다. 김말봉의 ‘찔레꽃’ ‘꽃과 뱀’ ‘바람의 향연’은 식민지, 해방 공간, 6.25 전쟁기를 관통하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성의 경제적, 사회적 욕망을 드러냈다. 가장 통속적인 작가로 평가받아온 박계형은 대표작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을 통해 운명적 만남과 비련, 결혼 등 사회적 제도에 대해 은근한 저항을 드러냈고, 그 만큼 비난도 많이 받았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이들 작품을 다시 찾아 읽고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특히 동시대 작품 활동을 했던 남성 작가 정비석의 ‘자유부인’과 ‘바람의 향연’을 비교해 읽거나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과 박계향을 나란히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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