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섹스/라이프’

넷플릭스 ‘섹스/라이프’  ⓒ넷플릭스
‘섹스/라이프’의 주인공 빌리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다. 겉보기에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그의 삶에서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남편과의 섹스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가져온다.  ⓒ넷플릭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가며 최선의 선택을 하지만 어느 순간 ‘그때 다른 것을 택했다면 어땠을까?’라는 미련이 남곤 한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후회는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동안 쌓여만 간다.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한번쯤은 ‘결혼하지 말걸’ 혹은 ‘그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봤으리라. 이와 같은 ‘만약’을 그린 넷플릭스의 ‘섹스/라이프(SEX/LIFE)’가 여성들 사이에 화제다.

‘섹스/라이프’의 주인공 빌리는 일과 가정에 충실한 남편 쿠퍼와 귀여운 5살 아들, 갓난쟁이 딸과 함께 교외 주택에 거주하는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로 그려진다. 겉보기에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그의 삶에서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은 불만족스러운 쿠퍼와의 섹스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평온한 일상에 균열을 가져온다. 그의 섹스에 대한 불만은 과거 연인이자 완벽한 섹스 파트너였던 브래드를 떠올리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그는 평온한 가정을 지키고자하는 몸부림과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된다.

‘섹스/라이프’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중심에 두고, 드라마 내내 여성의 삶에 공감할 장치들과 이를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성적 욕망 그 자체다. ⓒ넷플릭스
‘섹스’와 ‘라이프’ 사이의 ‘/’(슬래시)를 삽입해 섹스와 삶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넷플릭스

‘섹스’와 ‘라이프’ 사이 슬래시의 의미

드라마는 ‘섹스’와 ‘라이프’ 사이의 ‘/’(슬래시)를 삽입해 섹스와 삶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려준다. 주인공 빌리의 삶에 섹스에 대한 갈망이 미친 파급력은 그의 일상을 뒤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 된다. 쿠퍼와의 불만족스러운 섹스는 과거의 연인, 그리고 과거 자유로웠던 결혼 이전의 삶에 대한 그리움을 낳는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욕망들은 처음엔 과거를 추억하는 일기의 형태로 표출되지만,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과 그리움은 점점 쌓여 그는 길을 걷다가, 대화하다가 흐르는 눈물에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때때로 넋이 나가면서 육아와 가사에 소홀하게 되고 삶은 온통 뒤죽박죽된다.

빌리가 갈망하는 ‘만족스런 섹스’는 과연 성적 욕망만을 뜻하는 것일까? 드라마에서 친구 샤샤와 지도교수의 입을 통해 섹스는 빌리가 이루지 못했던 것에 대한 욕망이자 미련을 나타내는 상징 혹은 은유임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과거 그는 브래드나 쿠퍼와의 첫 만남에서 스스로를 성공과 뉴욕의 생활을 꿈꿨던 조지아 출신이라 소개할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브래드와의 연애에 지친 그는 안정적인 현재의 남편 쿠퍼를 만나 자신의 커리어와 욕망을 지연 시키고 육아와 가사에 매진하는 전업주부로서 변모했다. 남편과의 불만족스런 섹스는 아무런 문제없던 결혼 생활에서 오랫동안 잊었던 자유롭고 진취적이며, 야망이 있던 결혼 이전의 모습을 깨우는 계기가 된다. 결국 과거 연인에 대한 미련은 그가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것들,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위해 포기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넷플릭스 ‘섹스/라이프’  ⓒ넷플릭스
‘섹스/라이프’는 심리학과 페미니즘을 극적 장치로만 이용한다. ⓒ넷플릭스

페미니즘은 맥락 없이 극적 장치로만 이용

주목할 점은 빌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과 그가 자유와 안정이라는 ‘양손의 떡’을 모두 갖겠다는 결정을 보여주면서, 드라마에 심리학과 페미니즘을 슬쩍 얹는 것이다. 빌리는 심리학 박사 과정생이며, 그의 절친 샤샤는 심리학 박사이자 교수다. 앞서 언급했듯 심리학을 통해 드라마는 빌리가 처한 현실과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을 설명하는 장면들을 중간에 보여준다.

하지만 일부일처제를 지지했던 심리학도 빌리에게도, 문화와 친밀성에 대해 강의하는 샤샤에게도 섹스의 위력 앞에서는 심리학적인 지식과 자신이 지지하는 학문 세계는 별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샤샤의 출판 기념회에서 ‘베티 프리단’의 말이 인용되고 그에 감동받은 빌리가 과거의 연인 브래드를 찾아가게 하는 자극제로 활용된다. 베티 프리단이라는 걸출한 페미니스트는 단지 빌리가 브래드에게 갈 구실을 만들어주는 하나의 장치로 이용됐을 뿐이다.

이렇듯 드라마는 심리학과 페미니즘을 극적 장치로만 이용한다. 겉보기에는 여성의 성적 주체화와 의지적인 여성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리학과 페미니즘은 맥락 없이 인용되는 장치로 소모되고 주인공 빌리의 선택은 이해와 공감을 부르기보단 이기적으로 보일 뿐이다. 

‘섹스/라이프’  ⓒ넷플릭스
만약 ‘섹스/라이프’가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이 가보지 않은 길,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리면서, 기혼여성들의 공허함과 어려움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넷플릭스

선정성과 다양성에 손쉽게 기대는 OTT

일명 ‘미드’라 불리는 미국 드라마는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거나 제한된 표현이 가능한 것들을 접할 수 있던 통로였다. 섹스와 동성애, 다양한 가족의 모습들은 여전히 국내 드라마에서 쉽게 다뤄지지 않는 소재이지만, 넷플릭스와 같은 글로벌 OTT들은 자연스럽게, 일상적으로 이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돼왔다.

특히 넷플릭스의 흥행을 주도했던 오리지널 작품들은 보다 여성 지향적이며,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것들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호감을 높여왔다. 이 같은 글로벌 OTT의 역할은 다양한 간접 경험의 폭을 넓힌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어느 순간 구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선정성과 다양성에 손쉽게 기대는 경향들이 나타나고 있다.

‘섹스/라이프’도 여성의 성적 욕망을 중심에 두고, 드라마 내내 여성의 삶에 공감할 장치들과 이를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성적 욕망 그 자체다. 여성의 삶에 대한 고찰은 사라져버리고 섹스만 만족스러우면 된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만약 드라마가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는 여성이 가보지 않은 길, 자유에 대한 갈망을 그리면서, 경력단절 여성 혹은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기혼여성들의 공허함과 어려움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든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