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개 여성‧시민단체 성명
1년 전 오늘인 7월 8일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 전 시장의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접수하면서다. 피소 사실 유출과 가해자 사망이라는 초유의 상황 속에서 피해자의 용기와 시민들의 연대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과 권고, 제도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극심한 2차 가해 속에서 “여전히 피해자는 일상으로의 복귀가 요원하다”고 연대단체는 전했다.
피소사실 유출‧가해자 사망으로 2차 가해 극심
289개 여성‧시민단체로 구성된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8일 성명을 통해 피해자의 고발 이후 드러난 문제를 정리하고 과제를 제시했다.
공동행동은 먼저 “가해자가 사망했으니 진실 규명도 필요 없다는 가해자 중심적 사고”의 문제를 들었다. 단체는 “고소 접수 다음 날 전해진 가해자의 사망 소식은 사건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놨다”며 “수사기관이 ‘공소권 없음’을 핑계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끄는 동안 피해자와 변호인, 지원단체에 대한 공격은 나날이 심해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가해자가 사망했으니 진실 규명도 필요 없다는 가해자 중심적 사고”로 인해 “‘무혐의’처분을 ‘무죄’로, ‘무고’의 증거로 악용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본사건을 ‘수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일로 만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 결정으로 이어졌다(7월30일). 조사 결정 180일만에 인권위가 “박 전 시장의 언동은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결론내리면서 사건의 실체적 진실 일부가 규명될 수 있었다(1월25일). 인권위는 성폭력 피해 사실의 인정과 함께 △작동하지 않는 조직 내 성폭력 피해자 보호제도 △인지됐지만 ‘관행’으로 지속·반복된 성차별적 괴롭힘 △성역할 고정관념에 따라 여성에게 요구되는 직무‧노동환경 등 성폭력을 묵인하고 방조하고 키우는 제도와 조직문화를 지적하고 관련 기관에 시정을 권고했다.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호명… 원칙보다 진영
공동행동은 “잇달아 발생한 지자체장의 성범죄에 대한 반성이나 피해자 인권보장에 대한 고민은커녕 책임 회피와 눈치 보기에만 급급했던 여당의 사과를 끌어낸 점 또한 되새길만하다”고 짚었다. 사건 초기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은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호명하며 2차 가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 ‘재보선 발생 책임이 있으면 후보를 공천하지 않는다’는 기존 민주당 당헌까지 고친 끝에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를 냈다.
또 단체는 “자당 성폭력 사건에는 뒷짐 지고 있다가 여성의원들을 앞세워 호통치던 야당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며 “진영 논리에 따라 성폭력 사건을 달리 이해하고 이용하려는 모습은 여·야는 물론 시민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기에 더 분노스러웠고, 참담했다”고 비판했다.
공동행동은 “여전히 피해자의 ‘일상으로의 복귀’는 요원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단체는 “중앙지방검찰청에 묶인 원 고소 사건의 수사는 언제 마무리될지 알 수 없고, 악의적으로 피해자의 신원을 공개한 자들에 대한 기소도 진척이 더디기만 하다”면서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공개하며 피해자의 안전을 위협한 자들에 대한 엄중한 조처는 즉각적으로 취해져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저벅저벅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공동행동은 지난 3월 17일 공개된 피해자의 이 발언을 언급하며 “1년 전 피해자가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권력형 성범죄에 맞선 것처럼, 오늘 우리는 새로운 1년을 시작하며 또 한 걸음 나아가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걸음에 정부가, 국회가, 수사기관과 재판부가, 정치권이, 언론·기업·학교가,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하는 모두가 함께하기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