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오지랍'으로 늘 어려운 이웃 돌본 어머니는 나의 스승

당신에게 엄마는 어떤 존재인가요. 시간의 원을 돌고 돌다보면,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엄마라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는 엄마야말로 리더십 에너지의 원천이었고, 어떤 리더보다 더 큰 리더였던 존재였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엄마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조현욱 변호사와 어머니 양성순씨(83세) ⓒ조현욱 변호사
조현욱 변호사와 어머니 양성순 씨(83세) ⓒ조현욱 변호사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시름 속에 있지만, 그 속에서도 봄은 가고, 또 초록빛 짙은 여름이 오고 있습니다. 비온 뒤의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하얀 이팝나무처럼 인생 후반부를 조용히 일거가고 계시는 친정 어머니를 뵈러 가는 주말입니다.

친정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얼굴은 한껏 기쁜 얼굴로 반기시면서도 바쁘니 오지 않아도 된다. 바쁘니 조금만 있다가 얼른 가라고 하십니다. 늘 바쁘다고 허둥지둥 했던 저의 모습을 반성하며 보고 싶은 속 마음을 접어두시고 바쁜 자식을 먼저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한번 더 느낍니다.

어머니는 꽃다운 나이에 전북 순창의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께 시집오셔서 많은 고생을 하셨지만 늘 삶으로 성실함과 헌신을 보여주시고, 늘 기도로 자녀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나보다 남을 먼저 챙기시는 것이 습관처럼 삶에 배어 있으셨습니다. 어릴 때 시골에서 품앗이로 농사를 지으실 때, 새마을 운동을 할 때, 동네 행사로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잔치준비를 할 때 어머니는 언제나 힘든 일,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나서서 하시고, 다른 집 아이들을 저희 남매보다 먼저 챙기셨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태도가 어릴 때는 불만스럽고, 섭섭한 적도 있었으나, 성장한 이후로는 이런 모습이 자랑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때 순창 시골에서 부산으로 이주하여 고생길이 시작되었으나, 부모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성실한 태도로 묵묵히 살아가셨습니다. 부산에서 어렵게 살던 중에도 우리 집에는 전북 순창에서 부산에 공장 다니러 온 고향 동네 언니들, 사촌언니들, 친척들이 으레 우리 집에 같이 살면서 거쳐 갔습니다. 자취방을 얻을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지냈던 것입니다.

배움이 짧으시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까닭에 고정된 직업도 없어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제가 중학교 때 ‘전주식당’이라는 상호의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이 때 본격적으로 주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주변의 힘들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천성을 타고 나셨습니다. 헐벗은 노인을 보면 꼭 식당에 모셔와 따뜻한 식사를 꼭 대접하고 양말을 사서 신겨 보냈습니다.

집을 나온 위기청소년을 보면 꼭 집에 데려와 밥 먹이시고, 재워주시고, 타일러 보내십니다.

고1때는 가출여학생을 먹여주고, 재워 주었는데 그 다음날 식당 돈통에 있던 돈을 모두 훔쳐 달아난 사건도 있었습니다.

조현욱 변호사 어머니 ⓒ조현욱
조현욱 변호사 어머니 양성순 씨 ⓒ조현욱

어머니의 이러한 착한 오지랖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 자식들이 좋은 옷을 사드리거나 선물을 드리면 곧 어머니의 손을 떠나 없어져 버립니다. 더 필요하다고 보이는 사람에게 주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어머니는 언뜻 보면 자식도 없는 취약계층의 어르신처럼 보입니다. 자식들이 사다드리는 좋은 것을 모두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어 버리시고, 정작 당신 자신을 위하여는 별로 가꾸지도 않으시고 누리지도 않으십니다. 가끔 딸들이 외모도 신경쓰는 것이 좋다고 말씀드리면,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위하여 치장하고 가꾸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속마음이 진짜 중요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머니의 말씀을 수긍하면서도 그래도 겉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 아직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깊은 신앙이 부족하다고 안타까워 하십니다.

어머니는 외모를 꾸미시지 않으실뿐 아니라, 죽으면 ᄊᅠᆨ어 없어질 육신을 너무 아끼고 편안히 지내면 죄악이라 하시며 늘 무언가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수입을 작은 개척교회에 헌금하십니다. 좀 쉬시라고 투정아닌 투정을 하면 죽어 썩어 없어질 육신을 아끼는 것보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며 매일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십니다.

이제는 어머니도 육신의 힘이 부치시는지 허리도 굽으시고, 고관절도 아프다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할지라도 어머니는 천국에 가실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저도 알게 모르게 엄마를 닮았는지, 어려운 주변 사람들에게 저절로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갑니다. 제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 대한 동질의식이 있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자라면서 어머니의 모습을 은연 중에 많이 보고 존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 미약하지만 어머니의 삶을 뒤따라 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언제나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 그 어머니를 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 조현욱 변호사는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한 뒤 10년간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공익변론을 맡았다. 이후 판사 생활을 거쳐 2008년 변호사 개업을 한 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대한변협 부협회장, 한국여성변호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