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놀기
혼자 놀기
  • 여성신문
  • 승인 2005.05.12 16:29
  • 수정 2005-05-12 1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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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란 여성학자







내 친구 하나는 젊었을 때 혼자 외국 유학도 하고 사회생활도 오래 한 전문직 여성이다. 딸 키우는 일을 비롯해 무슨 일이든지 혼자 척척 해내는 유능하고 독립적인 그가 단 한 가지 혼자 못하는 일이 있다. 혼자 외식하는 일이다. 굶으면 굶었지 혼자서는 절대로 음식점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남들의 시선이 싫어서란다. 아니 식당에서 자기 밥 먹느라고 바쁜 사람들이 남 혼자 먹는 걸 관심 있게 보기나 하겠냐고 해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호기심에서건, 동정심에서건 흘깃거릴 게 뻔하다는 것이다.



난 그 친구와 다르다. 서울이건 지방이건 음식점에 혼자 들어가서 밥 먹는 건 다반사다. 내 배 채우는 데 바빠서 남들의 시선 따윈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 친구보다 독립적인 인간이라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된다. 그 친구는 오래 전부터 혼자 영화관에 잘 갔지만 내가 혼자 영화관에 가게 된 건 올해가 처음이니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도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결국 놓친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친구들도 저마다 바쁜지라 시간 맞추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고 제일 만만한 게 그래도 남편이라 함께 보자고 제안했다가 시간상 이유로, 혹은 취향상 이유로 번번히 거절당하고 삐쳐 포기해 버리기 일쑤였다. 혼자 가는 건 왠지 창피했고, 게다가 제가 무슨 정경부인이라고 남편을 두고 가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었던 거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여태 못 했지?



요즘은 영화도 속전속결이라 흥행이 안 된다 싶으면 일주일도 안 돼 막을 내려 버리기 때문에 여간 민첩하지 않으면 비디오로 봐야 한다. 그렇지만 비디오로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영화처럼 감이 다르다. 그렇게 바보처럼 살다가 지난 여름 <그녀에게>도 놓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나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난 혼자 영화관을 찾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걸 왜 여태 못 했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 산에도 가끔 혼자 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 산에 오는 남자들은 흔했지만 여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혼자 산에 오는 여자들이 요즘 들어 급속히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늑한 곳에 혼자 앉아 책을 보는 여자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여럿이 떼를 지어 산이 떠나가라고 수다를 떠는 모습보다 백 배 천 배 더 멋있는 풍경이다.



그 날은 친구와 함께 간 날이었다. 정상 부근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내 또래 여자가 사과를 깎아 건네주면서 말을 걸어 왔다. 늘 남편 일행에 끼여, 여럿이 다녔는데 2년 전에 남편이 죽고 처음으로 혼자 와봤다고. 오기 전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고.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고. 나는 진심으로 축하를 해줬다.



혼자 놀아봐야 외로움도 즐길 줄 알아



남자들의 패거리문화를 욕하지만 여자들도 혼자 놀기를 두려워한다. 그야말로 화장실에 갈 때도 친구 팔을 끼고 간다. 혼자 노는 걸 좋아하면 스스로도 왕따당한 기분이고 남들도 왕따를 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더불어 노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혼자 놀 줄도 알아야 한다. 혼자 노는 법을 못 배우면 항상 남에게 의존하고 만약 거부당하면 남을 원망하게 된다. 혼자 놀 줄 알아야 외로움을 즐길 줄 알게 된다. 특히 혼자 놀 줄 모르면 노년이 삭막해진다.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 세대보다 훨씬 낫다. 어른들이 대부분인 콘서트에 가보면 혼자 오는 여자들은(물론 남자들도) 눈 씻고 봐도 없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몰리는 콘서트에는 혼자 온 여자들이 넘쳐난다. 그들은 혼자 와서 즐겁게 함께 어울린다.



혼자 노는 법을 못 배운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항상 아는 사람과는 잘 어울리는지 몰라도 낯선 사람에게는 차갑게 등을 돌린다. 한 테이블에 앉아서도 자기들끼리 떠들지, 옆에 앉은 혼자 온 사람한테는 눈길도 안 준다. 이 점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어쩌면 그렇게 닮은 꼴인지. 아니 남자들은 그래도 형식적으로라도 서로 소개를 하는데 여자들은 그것도 없다. 그래서 난 큰 모임이 영 껄끄럽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내겐 혼자 놀기에서 도전할 분야가 남아 있다. 멋진 여자 한비야처럼 혼자 지구를 떠도는 일은 언감생심이지만, 패키지 여행이라도 혼자 끼여 여행하기다. 끼리끼리 문화 속에서 철저히 왕따당할지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 나말고 그런 여행 해보고 싶은 사람, 누구 없소?(이런, 혼자 놀자면서 또 다른 사람 꼬드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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