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에서 불법 성착취 영상을 제작, 판매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여성신문·뉴시스
지난해 3월 17일 텔레그램에서 불법 성착취 영상을 제작, 판매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포토라인에 섰다. 성범죄자로는 첫 신상공개였다. ⓒ여성신문·뉴시스

 

‘n번방’ 1년, 모두가 추적단 불꽃이 될 시간

작년 이맘 때 떠들썩했던 ‘n번방’ 사건을 돌아본다. n번방 사건은 젊은 여성들이 주도해 사회변화를 이끌어낸 새로운 여성운동이었다. 온라인 페미니즘의 역량은 ‘강남역 시위’를 거쳐 혜화역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경찰의 편파수사에 공분을 느낀 젊은 여성들 36만명(누적 참가자수)이 혜화역에 집결했다. 온라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수십 만명의 젊은 여성들이 한 가지 의제로 모인 최초의 사건이었다. 혜화역 시위는 청와대와 여가부의 관심을 끌긴 했지만 당장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디지털 세대 여성운동의 ‘불꽃’이 되었다. 그 불꽃은 n번방을 파헤친 ‘추적단 불꽃’으로 더 크게 살아났다.

n번방은 텔레그램의 디지털 성착취물 불법거래 장터였다. 텔레그램 내 또 다른 성착취 대화방인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닉네임 ‘박사’)은 작년 3월 17일 구속돼 카메라 앞에 섰다. 성범죄자로는 첫 신상공개였다. 경찰은 2020년 9개월간 3575명을 검거했고 이중 245명이 구속시켰다. 확인된 피해자만도 1154명. 이 중 10대가 60% 이상이었다. 가해자는 공무원, 언론인, 종교인, 군인 등 연령· 계층·직종 불문이었다. 한 방송국의 기자가 회원으로 밝혀져 해임되기도 했다.

대대적인 검거가 있었지만 1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n번방은 계속 진화하며 우리 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던지고 있다. 텔레그램의 한계를 인식한 가해자들은 더욱 ‘안전’한 플랫폼을 찾아 나섰다. ‘디스코드’라는 음성 메신저에서 ‘n번방+박사방 자료모음’ 거래를 확인한 보도도 있었다. 무한 복제되는 디지털 세계의 속성상 불법착취물이 어디로 얼마나 퍼져 있을지 확인할 수 없고, 언제든지 그 영상이 유통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피해 당사자들은 해당 영상을 삭제하고 삭제하지만 불안감과 공포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다. n번방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

돌이켜보면 n번방이 거둔 성과가 크다. 온라인이 얼마나 인권유린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 광범위한 실상을 고발했고 가해자를 대대적으로 응징했다. 그 성과에선 우선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가 첫 번째 공로자다. 2019년 2명의 여대생 취재팀 ‘추적단 불꽃’은 집요한 취재로 범죄의 실상을 알리고 고립된 피해자를 구출해냈다. 그 과정에서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리셋’의 활동이 없었다면 피해당사자들이 증언에 나서는 용기를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청와대와 국회에 국민 청원을 통해 디지털 성범죄 철저한 수사와 피해자 보호를 촉구했다. 경찰은 청장 아래 특별수사본부를 두고 적극적인 수사를 펼쳤다. 국제수사 공조와 사이버 수사 역량이 축적돼 있던 경찰은 외국에 서버를 둔 피의자를 신속하게 검거할 수 있었다. 편파수사로 비난 받던 경찰이 n번방 사건에서는 인권수사의 개가를 올렸다.

여론에 대한 응답으로 대통령의 지시가 박사방 조주빈 검거 일주일 뒤에 나왔다. 정치권의 관심은 공권력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크게 작용했다. ‘박사방 방지법’이라 불리는 성폭력 특별법 개정이 있었고 가해자들에 대한 양형기준이 과거에 비해 크게 상향되었고, 박사방 가담자였던 사회복무요원의 개인정보유출을 계기로 병역법이 개정됐다. 이런 작업을 통해 디지털 성폭력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할 수 있는 촘촘한 법망을 마련할 수 있었다. 혜화역 시위의 불꽃은 n번방 사건에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

디지털 세대의 여성운동은 기성세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의제와 활동방식을 보였다. ‘어른’들의 조직화된 단체들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용감했고 지혜로웠다. 추적단 불꽃은 국제 앰네스티로부터 언론 특별상을 수상했고 한국YWCA에서 젊은 지도자상을 받았다, 디지털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로 시작한 단체 ‘리셋’은 카카오임팩트 펠로우십에 선정됐다. 앞으로 여성운동의 앞날은 밝다.

n번방은 지금 이 시간에도 진화하며 새로운 플랫폼을 찾아다닐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 전체가 추적단 불꽃이 돼야 한다.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김효선 여성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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